나의 이야기

[스크랩] 韓屋(우미량,하앙식,다포,주심포,익공) (옮긴글)

챨리박 2011. 2. 28. 15:49

우미량(牛眉樑)

 

수덕사 대웅전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또 다른 곳은 대웅전의 측면이다. 원래는 이곳에 풍판이 있었으나 1937년 해체, 수리를 하면서 풍판을 떼어 내고 대웅전의 아름다움을 새롭게 볼 수 있게 되었다. 대웅전의 측면을 보면 이 건물의 구조를 파악할 수 있다. 특히 건물의 하중을 전달하는 부재인 우미량(牛眉樑)은 구조적인 기능도 뛰어나지만 곡선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좌우에 세개씩 소꼬리처럼 휘어져 올라간 부재가 우미량입니다..홍예초방이라고도 합니다.

 

 

 

 수덕사 대웅전 전경

 

고려시대 목조건물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절집이 예산 수덕사 대웅전이다. 대웅전은 물론 석가모니불을 모신 절집이다. 그러나 법신불 비로자나불이 몸으로 응신하면 석가모니불이요, 중생 구제의 서원을 세우고 정진하여 부처가 되면 아미타불이 되니 사실은 석가모니불과 아미타불은 동상이체일 뿐이다. 따라서 대웅전 역시 진리가 펼쳐지는 이상인 극락의 세상으로 형상화했던 것이다.

 

수덕사 대웅전은 정면 3칸에 측면 4칸이지만, 칸의 넓이가 널찍하여 무량수전과 그 크기가 비슷한 건물이다. 역시 고려시대까지 널리 사용되었던 주심포계 건물이며 맞배지붕이다. 우리나라 목조건물 구조에서 가장 단순한 구조라 할 수 있다. 칸 사이가 널찍하여 외형이 푸근한 느낌을 갖는다. 기둥 위에만 공포가 있어 더욱 깔끔하다. 건물은 높은 기단 위에 마치 부처님처럼 올라 앉아 있다.

 

절 집을 겉 모습만 보고 지나치는 사람이 많다. 극락 앞에까지 왔다가 극락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하산해버리는 경우가 아닌가. 부처님이 뒤쪽 한 칸을 비워두고 중앙에 정좌하고 있다. 불상의 앞 기둥 두 개는 생략했다. 배흘림 기둥들이 바깥으로 죽 진을 치고 있고, 대들보가 굵직하게 기둥과 직각으로 자리잡고 있다.

 

 

 

 

▲ 목조 건물은 많은 부재를 통해 못 없이 연결되는데, 사진에서 보이는 곡선의 '우미량'은 기능적 의미뿐만 아니라 곡선의 아름다움을 한껏 드러내고 있다. 우미량은 지붕을 가로 방향으로 떠받치는 도리들을 연결해 무게를 분산시키는 기능을 한다.

 

 

▲ 수덕사 대웅전 귀기둥, 배흘림 기둥을 깍은 이는 누구일까? 소꼬리모양의 들보와 기둥, 들보, 도리의 직선들이 교묘하게 어울린다. 우아한 백제계 전통이 건물에서 살아나고 있다.

 

 대들보의 끝 부분은 아기 궁둥이처럼 부드럽고 매끈하게 처리했다. 중간 기둥에서 바깥 기둥으로 연결되는 들보는 퇴보로 처리했다. 들보는 중간들보, 대들보, 퇴보 등 3단계로 구성하였다. 높은 들보에서 낮은 들보로 소꼬리 모양의 들보(우미량)로 연결하여 기둥으로 무게를 분산시키고 있다. 들보의 끝 부분 부드러운 곡선과 우미량의 곡선이 가미되어 매우 우아하고 부드러운 느낌을 연출하고 있다.

수덕사 대웅전은 전체적으로 부석사 무량수전에 비하여 부드러운 느낌을 지니고 있다. 수덕사 대웅전 지역은 백제의 지배 영역에 해당한다. 백제의 우아하고 포용적인 경향이 이 대웅전에 스며들었을 것이다. 충청도와 전라도의 산세와 말씨도 이런 건물의 성격에 서로 영향을 끼쳤다.

 

고려시대 목조 건물인 무량수전과 수덕사 대웅전은 자웅을 가리기 어려울 정도로 최고로 친다. 어느 건물이 더 맘에 드나요? '무량수전이 영주 부석사에 있기 때문에 최고의 건물이며, 수덕사 대웅전이 예산 지역에 있기 때문에 또한 최고의 건물이다'가 정답이 되어야 한다. 두 건물이 바뀌어 있다면 자연과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하앙식 구조

 

하앙식 구조

 

 

 

 화암사 극락전은 우리나라에 단 하나뿐인 하앙식 구조이다. 하앙식 구조란 바깥에서 처마 무게를 받치는 부재를 하나 더 설치하여 지렛대의 원리로 일반 구조보다 처마를 훨씬 길게 내밀 수 있게 한 구조이다.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근세까지도 많이 볼 수 있는 구조이지만 우리니라에서는 유일한 것으로 목조건축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화암사 극락전 전경

 

화암사는 불명산 시루봉 남쪽에 있는 절로 본사인 금산사에 딸린 절이다. 절을 지을 당시의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원효와 의상이 유학하고 돌아와 수도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신라 문무왕이 이전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극락정토를 상징하는 극락전은 1981년 해체.수리 때 발견한 기록에 따르면, 조선 선조 38년(1605)에 세운 것으로 되어 있다.

 

앞면 3칸.옆면 3칸 크기에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 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꾸며 소박하고 작은 규모를 보이고 있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위부분에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건물 안쪽 가운데칸 뒤쪽에는 관세음보살상을 모셨으며, 그 위에 지붕 모형의 닫집을 만들어 용을 조각하였다.

  

 하앙 양식은 처마를 들어 올리고 처마를 깊게 돌출시키기 위해서 발단된 양식이다.

- 특징 : 지렛대의 원리를 이용하여 지붕서까래와 도리 밑에서 건물 안으로부터

  밖을 길게 뻗어 나와 처마 를 받쳐주는데 사용되었다.

- 건축물 : 완주 화암사 극락전, 금산사 미륵전

 

 

 

 

 

                                           화암사

 

                                                       화암사

 

▲ 전면 하앙. 용두각으로 투각되었다.
▲ 후면 하앙. 단순하게 삼각형으로 처리되었다.

 

 

다포집

 

▣ 다포식

   다포식 건축물중 건립연대가 확실한 것은 고려말의 심원사 보광전(1374년)과, 석왕사 응진전(1386년 창견, 1950년 소실)및 호지문(1392년 창견, 1950년 소실)등이 있으나. 이들은 모두 북한에 있기 때문에 그 현황을 알 수 없다. 조선초기의 건물로는 역시 북한에 있는 개성 남대문(1394년), 평양 보통문 (1473년)과,  남한의 서울 남대문(1396년 창건, 1448년 중건), 봉정사 대웅전(15세기), 개심사 대웅전(1484년) 등이 있으며, 이들 다포식 건물들은 그 후 크게 유행되어 17세기 이후 사찰의 중요 건물은 물론이고, 궁궐, 성문, 분묘 등 많은 대형 중요 건물에서 보이고, 특히 주목되는 것은 고려 말이나 조선초기와는 달리 화려하고 장식적인 요소들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경향을 볼 수 있다.

 

함경남도 안변의 석왕사 응진전의 모습. (일제시대 엽서) 그런데 실제로는 응진전이 아니라 응진당이라고 되어있다. 이 건물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소실되어 지금은 볼 수 없다.

 

석왕사 전경

함경남도 안변군 문산면 설봉산에 위치한 사찰인 석왕사에 있는 조선 초의 건물. 석왕사는 서산대사의 《설봉산석왕사기(雪峯山釋王寺記)》에 의하면 이 절은 고려 말 무학대사가 이곳의 토굴에서 지내다가 이성계(李成桂)의 꿈을 해석해 준 것을 인연으로 하여 이성계가 왕이 되기를 기원하여 크게 절을 창건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절에 고려 말∼조선 초의 건물로 알려진 응진전이 있고, 태조 이성계와 깊은 인연으로 인하여 조선시대 왕실로부터 상당한 보호를 받았으며, 일제시대에는 31본산의 하나이었다.

 연탄 심원사 보광전(燕灘 心源寺 普光殿) 연탄 심원사는 황해북도 연찬군 연탄읍에 위치

 

 

 남대문

 

 

 

 봉정사 대웅전 외부 공포

 

 내부 공포

 

봉정사 대웅전의 익공식인 다포집

 

개심사 대웅전 다포형식과 용장식

 

 개심사 대웅전의 귀공포와 처마

 

 개심사 대웅전 천정

 

 

 

 고려 말에서 조선초기의 다포식 건물의 특징적인 요소를 간단히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우선 축부에서

1. 기둥의 경우

· 기둥에 배흘림이 있는 것 ; 심원사 보광전, 석왕사  응진전

· 기둥에 배흘림이 없는 것 ; 개성 남대문 ,서울 남대문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건축물인 개성 남대문의 모습 원래의 모습

복원 후 현재의 개성 남대문

 

 

남대문 현판 글씨는 한석봉의 친필

 

 

2. 창방 뺄목의 형상 (뺄목-부재 머리가 다른 부재의 구멍이나 홈을 뚫고 내민 부분. ≒방두. )

· 뺄목 끝을 직절한 것 ; 평양 대동문, 의주 남문

· 뺄목 끝을 초각한 것 ; 심원사 보광전외 대부분의 건물

 박내겸이 장림에 서서 바라보았을 대동문
자료:『기성전도』(서울대학교 규장각) (부분)

 

일제강점기 보수전의 모습

 

 일제 강점기 시기의 대동문 

형재의 대동문

 

공포에서 

1. 공간포의 배치 내용

· 정면 중앙간에 1구 ; 석왕사 응진전

· 정면 중앙간에 2구 ; 심원사 보광전

· 정면 중앙간에 3구 ; 개성 남대문

· 정면 중앙간에 4구 ; 서울 남대문

2. 공포 외부의 구성

· 출목수

  - 1출목 ; 평양 보통문, 개성 남대문

  - 2출목 ; 봉정사 대웅전, 개심사 대웅전, 석왕사 응진전, 서울 남대문 하층

봉정사 대웅전의 2출목 공포

 

- 3출목 ; 심원사 보광전

· 중공 계심조 ; 심원 보광전외 대부분

· 중공 계심조에 투심조가 보이는 것 ; 평양 숭인전, 평양 보통문, 평양 대동문

· 우설형과 교두형 첨차의 사용

· 우설형만으로 된 것 ; 개성 남대문, 개심사 대웅전, 서울 남대문 하층

· 우설형과 교두형 병용 ; 심원사 보광전, 석왕사 응진전, 평양 보통문, 봉정사 대웅전


가구 구성의 내용을 보면

1. 보와 도리와의 관계

· 보위에 도리를 얹은 경우 ; 개심사 대웅전, 봉정사대웅전

· 보와 도리를 분리한 경우

· 종보 및 대들보를 병용한 경우 ; 심원사 보광전

2. 내부 공간의 구성

· 고주를 세운 경우

  - 1고주 ; 심원사 보광전, 봉정사 대웅

  - 2고주 ; 평양 보통문(중층)

· 고주가 없는 경우 ; 개심사 대웅전

3. 대공형상

· 동자대공 ; 심원사 보광전, 봉정사 대웅전

· 화반대공(파련대공 포함) ; 평양 보통문, 개심사 대웅전

4. 솟을 합장재의 유무

· 솟을 합장을 사용한 것 ; 심원사 보광전, 종정사 대웅전. 개심사 대웅전, 평양 보통문

5. 천정의 형상

· 연등천정 ; 심원사 보광전(외진은 빗천정), 개심사 대웅전

· 우물천정 ; 봉정사 대웅전(원래는 연등으로 추정)

  이상 다포 건물의 중요 요소들을 형상별로 분류하여 보았다. 이들 내용에서 고려말 조선초기의 다포 건물를 요약하여 보면, 대략 다음과 같은 결과를 도출시킬수 있다.

   즉, 측부에서는 기둥이 주심포 건물에 비해 배흘림이 적거나 거의 원통형이 기둥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고려말의 건물이 심원사 보광전과 석완사 응진전에는 배흘림이 보이고 있어 고려기의 다포식에는 배흘림이 사용되었지만. 조선초기부터는 배흘림이 약해지거나 소멸되는 경향을 읽을 수있다. 중국의 경우에는 배흘림 기법이 당 이후에는 강남에서 약간 보일 뿐 흔치 않으므로 이 기법은 주심포계의 영향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다음으로는 창방의 뺄목에 주목하면 평양 대동문은 직절하였고, 심원사 보광전 등 대부분의 건물은 초각을 하였다. 중국의 경우에는 평방과 직절한 평방 뺄목이 11세기 초에 나타나고(遼 나라 봉국사 대전. 1020년) 12세기 후반에는 뺄목을 고형(孤形)의 평방(현묘관 삼청전, 1179년, 공묘비정, 1195년)으로 만든 것이 보인다. 화북지방에서는 이후 계속 사용된다. 한국의 평방은 화북의 것과 대비되며, 중국 강남의 경우는 화북보다 이 보급이 좀 늦어져 원대에서도 일반화되지 못하였다. 창방의 뺄목은 중국의 경우는 직절의것이 10세기 말에 나타나도, 12세기중반에는 고형이 화북, 강남 등지에서 함께 나타나 원나라에도 보급되고 명, 청대까지 이어진다.  한국의 장방 뺄목 형상은 원대의 것과 흡사한 점이 많다. 창방 뺄목을 초각 없이 직절한 것은 앞에 예를 든 창방으로 평양 대동문(1576년)과 의주 남문(1521년)인데, 주심포 건물에서는 이미 고려 시대의 봉정사 극락전에 직절의 창방 뺄목이 나타나고 있어 연대를 올려도 무방하며, 이는 중국의 요대에 보이는 것과 대비할 필요가 있다.

   공포에서는 우선 중앙간에 몇구의 공간포가 배치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며, 주상공포와 공간포의 형상이 같은지 아닌지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한국의 다포식 공포는 주상공포와 공간포의 형식이 동일하며 중앙간의 공간포는 서울 남대문, 신륵사 조사당, 평양 보통문, 평양 대동문 등이 4구를 놓았고, 3구를 놓은 것은 개성 남대문, 석왕사 호지문, 평양 숭인전, 2구는 심원사 보광전, 봉정사 대웅전, 개심사 대웅전, 청평사 극락전, 1구의 건물은 석왕사 웅진전 등 다양하다.

   중국의 다포건물을 보면, 오대산 불광사 대전(875년)에서 공간포를 볼 수있는데, 이 공간포는 주상의 공포와는 다른 공간포로 출목수가 적은 것이며, 그 다음으로는 오대의 봉국사 대전(1020년)으로 공간포가 주상포와 같고 요대까지 즉 당, 오대, 요대가지는 중앙간, 협간의 공간포는 각각 1구씩 배치된 것 같다. 북송때에 들어와서는 공간포의 구성기법이 발달하여 남송, 금대의 건물에서는 중앙간에 2구의 공간포가 많이 사용되었고, 원대에도 13세기까지는 그때와 같았으나 14세기에 들어와 중앙 간에 3구, 또는 4구의 건물이 보이고 있다. 명대에서는 권위 건축에 6-8구의 중앙간 공간포도 보이고 있어, 시대가 내려옴으로써 중앙간에 1구 배치된 것은 요대까지 올려 볼 수 있는 기능성이 있다고 생각되므로, 석왕사 응진전(1386년)은 11세기가지 올려 볼 수 있는 양식이라 생각된다.

    다음은 공포의 출목수(出目數)로 1출목에서 3출목의 것이 주로 보이는데, 1출목인 것은 평양 보통문, 개성 남대문이며 2층목은 봉정사 대웅전, 개심사 대웅전, 석왕사 응진전, 그리고 서울 남대문 하층이고, 3출목은 심원사 보광전이다. 이들 출목과 관련을 지어 생각해 볼 것은  출목과 직교하는 첨차로서 중국에서 말하는 계심조(計心造; 출목과 직교하여 첨차가 좌우로 전개 되는 형식)인지 투심조(偸心造; 출목이 있으나 출목과 직교되는 첨차가 없는 것, 즉 출목에서 좌우로 전개되지 않은 형식)인지가 문제인데, 한국의 고려말 조선초의 다포 건물은 평양숭인전(1467년), 평양 보통문(143년), 평양 대동문(1576년)에 투심조가 보일 뿐 이다.

   부분 계심조이며 출목에 직교하는 첨차가 소첨과 대첨으로 소위 중국에서 중공이라 불리우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중국의 경우는 계심조보다 투심조가 앞서는 양식으로 보고 있으며, 계심조이며 중공형식인 것이 유행한 것은 12세기 이후일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지역적으로 보면 현존하는 건물중 강남의 송,원대 건물중 완전한 중공계심조가 보이지 않고 있어 의문이지만, 일본의 다포가 남송의 말기에 강남 오산의 건축에 원류를 갖고 있다는 설을 인정한다면 이곳에도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일부 학자는 다포식의 투심조가 주심포식의 투심조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하는 설도 있으나. 다포식의 옛 식 계통의 가능성도 있다고 보인다.

   다음은 산미첨차의 선단 형상으로 우설형과 교두형 두 가지 형상이 있는데, 우설형으로만 된 것은 개성 남대문, 개심사 대웅전, 서울 남대문 등이 있고 우설형과 교두형을 함께 사용한 예는 심원사 보광전을 비롯하여  석왕사 응진전, 평양 보통문, 봉정사 대웅전 등에서 볼 수 있다. 우설형은 원래 하양의 선단 부분을 표현한 것이라 생각되는데, 이 시대에는 하양 구조의 유구는 하나도 현존하지 않고 있어 실제 하앙구조의 건물이 있었는지 아닌지 확실하지 않고, 다만 임진란 이후의 건물로 현재 전북 완주군의 화음사 극락전이 한 동 보일 뿐이다.

   중국에서는 하양의 본래 기능을 갖고 있는 형식을 진앙이라하고 하양의 형식만을 나타내는 산미첨차 끝에 우설형을 조각한 형식을 가앙이라 한다. 따라서 한국의 우설형 다포식 공포는 거의가 가앙이라 할 수 있다. 중국의 경우에는 가앙이 보이는 최초의 것이 태원 진사 성모전(1023-1102년)이며, 이 건물에 서는 진앙과 가앙을 함께 사용하였고, 가양만으로 된 건물은 산서 진성 야저촌 대묘 대제전(1169년), 강남 소주 현묘관 삼청전(1179)에서 보여, 12세기후반에서부터 가앙의 실제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원대 이후 명,청대에서 많은 가앙 건물이 보이며 특히 청대의 건물은 거의 모두 가앙 건물이라는 사실이 조사되었다.


 가구의 구성 내용을 보면, 우선 보와 도리의 관계에서 보 위에 도리를 얹는 경우와 보와 도리가 분리되어 보 위에 도리가 직접 놓이지 않고 보 위에 든 상태인데, 일반적으로 후자의 것이 옛식인 것 같다. 후자의 것으로는 심원사 보광전의 평주 상부에서 보인다. 심원사 보광전에서의 특이한 점은 공포 외부 선단 최상부애 첨차 하나를 올려 놓고 있는 것인데, 이로 인해 도리가 보 위에   뜨게 된 결과를 가져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내부의 공간을 보면, 고주를 세운 경우와 고주를 없엔 내부공간으로 둘 수 있는데, 하나의 고주를 세운 건물로는 심원사 보광전과 봉정사 대웅전이 있고, 2고주는 중층 건물인 평양 보통문이 있다. 고주를 없앤 건물은 개심사 대웅전 등이 있다. 대들보나 종보 위에 얹은 대공은 동자주를 세운 데와 화반을 사용한 예가 보이는데, 동자주의 예는 심원사 보광전, 봉정사 대웅전 등에 보이고, 화반의 예는 평양 보통문, 개심사 대웅전 등에 사용되었다. 중국 건축의 다포식 전형은 동자주를 얹는것이라 보이므로 한국이 다포 건물에서 화반은 주심포의 영향이 아닌가 추정된다. 솟을 합장의 사용은 심원사 보광전, 봉정사 대웅전, 개심사 대웅전, 평양 보통문 등이며, 16세기이후 다포식에서는 이 기법이 나타나지 않는다. 천정은 연등천정, 우물 천정, 연등․우물겸용 등이 있는데 심원사 보광전은 내진 상부는 우물천정이고 외진은 판재의 빗천정으로 하였고, 개심사 대웅전은 연등천정이며 봉정사 대웅전은 현재 우물천정으로 되어 있으나, 원래는 연등천정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중국의 다포 건물이 10세기 이후부터 우물천정이 사용된 것을 보면 한국 다포 건물의 연등천정은 옛식이거나. 아니면 주심포식의 양식을 흡수한 영향이라 생각된다.

   고려 말에서 조선초기의 주심포식과 다포식 건물들의 중요 요소들을 위에서 살펴 이것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다포 건축양식의 架構圖(1) - 前期

 

1) 개심사 대웅전(開心寺 大雄殿)

- 건립년대 : 절의 기록에 의하면 개심사는 신라 진덕여왕 5년, 백제 의자왕 14년 혜감국사가 지었다고 되어 있는데, 진덕여왕 5년(651)과 의자왕 14년(654)은 다른 해에 해당한다. 개심사는 백제 의자왕 14년(654) 혜감국사가 지었다고 전한다. 1941년 대웅전 해체 수리시 발견된 기록에 의해 조선 성종 15년(1484)에 고쳐 지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건물은 고쳐 지을 당시의 모습을 거의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 특징 :건물은 맞배지붕의 다포계 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내부는 가구가 그대로 보이게 연등천장

을 하고 있어 주심포계 형식의 특징도 보인다.

 

공포는 내3출목으로 짜였는데 특히 외부로 뻗은 쇠서는 밑으로 많이 처져 있어 다포계의 초기적

수법을 보이고, 또 종보 및 마루도리(종도리)를 받치는 대공은 모두 주심포집에서 볼 수 있는

파련대공을 하고 있음이 특징이다.


개심사 대웅전은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지붕 처마를 받치는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양식이다.


이 건물은 건물의 뼈대를 이루는 기본적인 구성이 조선 전기의 대표적 주심포양식 건물인 강진 무위사 극락전(국보 제13호)과 대비가 되는 중요한 건물이다.

 

개심사 대웅전은 그 연대가 말하듯이 이조초의 주심포가 다포로 전환할 무렵의 양상을 잘 나타

내고 있다.

        

 

        

 

        

 

 

 

 

 

 

2) 봉정사 대웅전(鳳停寺 大雄殿)

- 건립년대 :봉정사의 정전(正殿)으로 조선(朝鮮) 초기(初期)의 건물(建物)로 추정된다.


- 특징 :규모는 앞면 3칸·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주칸(柱間)의 창문(窓門)이나 벽체 등 일부가 초창후(初創後) 변경되었으나 골격은 전형적인 다포양식(多包樣式)을 잘 갖추고 있다. 특히 공포(공包)의 힘있고 가식없는 수법(手法)은 초기의 다포양식 특성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건물 내부(內部)에서 가구형식(架構形式)이나 세부기법에서도 외부와 같이 단조로우면서 견실한 공법(公法)이 초기의 다포양식 특징들을 보이고 있다.

 

앞쪽에 툇마루를 설치한 것이 특이하다.

단청(丹靑)은 창건(創建)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고려적(高麗的) 요소(要素)를 지니고 있어 건물(建物)과 함께 중요한 회화자료(繪畵資料)로 주목되고 있다.

 

 

 

 

 

 

 

 

3) 청평사 극락전(淸平寺 極樂殿)

- 건립년대 :청평사( 淸平寺 )는 고려( 高麗 ) 광종( 光宗 ) 24년(973)에 창건( 創建 )되어 백암선원( 白岩禪院 )이라 이름하였다가 문종( 文宗 ) 22년(1068) 이의( 李 )가 중건( 重建 )하고 보현암( 普賢庵 )이라 하였던 것을 선종( 宣宗 ) 6년(1089) 이자현( 李資玄 )이 중건하고 문수원( 文殊院 )이라 하였다. 조선( 朝鮮 ) 명종( 明宗 ) 때(1545∼1567, 재위) 보우선사( 普雨禪師 )가 다시 중건하면서 청평사( 淸平寺 )라고 개칭하고 대사찰( 大寺刹 )이 되었다.

 

- 특징 : 다포계양식( 多包系樣式 )의 팔작집으로 그 건축수법( 建築手法 )이 우수하여 국보( 國寶 )로 지정되었던 극락전( 極樂殿 ) 등 여러 건물이 있었으나 6·25동란( 動亂 ) 중 회전문( 廻轉門 )(보물 제164호)을 제외하고는 모두 소실( 燒失 )되었다.

현재( 現在 )의 극락전( 極樂殿 )은 근년에 신축( 新築 )하였다.

 

정면3칸 측면3칸 단층 팔작지붕이다.

내부가구는 천장을 가구한 탓으로 아무렇게나 모아 짜여 있는 듯한 감이다.

즉, 내부고주는 주두설치도 없고, 도리의 배치도 등간격이 아니며, 중종보 위의 대공도 동자주형

이며, 천장달대도 현대식의 간단한 구조이다.

 

이러한 처리는 점차 후기건물이 기능적으로 변화해 가는 징표이다.

 

 

 

 

 

4) 남대문(南大門)

- 건립년대 : 조선시대 서울도성을 둘러싸고 있던 성곽의 정문으로 원래 이름은 숭례문이며, 남쪽에 있다고 해서 남대문이라고도 불렀다.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태조 4년(1395)에 짓기 시작하여 태조 7년(1398)에 완성하였다. 지금 있는 건물은 세종 29년(1447)에 고쳐 지은 것인데 1961∼1963년 해체·수리 때 성종 10년(1479)에도 큰 공사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 특징 :이 문은 돌을 높이 쌓아 만든 석축 가운데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을 두고, 그 위에 앞면 5칸·옆면 2칸 크기로 지은 누각형 2층 건물이다.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 형태를 하고 있는데, 이러한 지붕을 우진각지붕이라 한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위부분에 장식하여 짠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그 형태가 곡이 심하지 않고 짜임도 건실해 조선 전기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하층공포는 내외 모두 2출목이며 기둥머리에는 키가 큰 창바을 걸었고, 창방과 기둥 위에는

넓적하고 두툼한 평방을 돌려, 그 위에 기둥 직상과 정면에는 柱間에 4구, 측면과 他柱間에는

각2구식의 중간포로 배열하고 있다.  

 

 

 

 

 

5) 평양 보통문(平壤 普通門)

- 건립년대 : 현재의 건물은 1473년에 고쳐 세운 것을 1644년, 1719년,1777년과 그 이후의 계속

되는 보수 끝에 오늘에 이른 것이다.

 

- 특징 : 정면3칸, 측면3칸, 우진각지붕.

내고주와 퇴주로 연결하고 고주상부에 종량으로 건너지른 기본형이며, 따라서 고주부분은 창방

뿐이고 평방은 없어 주심포로 구조되어 있다.

 

고주머리에 얹힌 樑頭 화반  등 세부는 수덕사 대웅전과 흡사하다.

 

 

        

    

 

다포 건축양식의 架構圖(2-1) - 中期

 

1)관룡사 대웅전(觀龍寺 大雄殿)

 

- 건립년대 : 관룡사는 신라시대(新羅時代)에 창건되었다고 하나, 이 대웅전은 1965년 8월 해체보수 공사때 중앙칸 마루도리에서 발견된 상량문(上樑文)에 의하면 조선(朝鮮) 태종(太宗) 원년(元年)(1401)에 창건, 임진왜란(壬辰倭亂)때 불타서 광해군(光海君) 9년(1617)에 중창하였고, 영조(英祖) 25년(1749)에 중수했음을 알 수 있다.

- 구조개요 :이 전각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집으로 다듬은돌 바른층쌓기의 기단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웠다. 공포(공包)는 내·외2출목(內·外二出目)으로, 기둥위와 기둥사이 평방위에도 짜올린 다포식이다. 초제공(初諸貢)과 이제공(二諸貢)의 살미첨차(山彌첨遮) 끝은 앙서(仰舌)로 되어 있으나, 안쪽에는 교두형(翹頭形)으로 되어 있어 건실한 짜임새를 갖추고 있다. 내부 바닥은 마루를 깔았고 천장은 우물천장을 이루며 중앙 후열에 세운 두 개의 고주(高柱)를 의지해 만든 불단(佛壇) 위에는 닫집을 달았다

 

이 건물에서 강조해야 할 점은, 가구방식은 공통으로 평범하나 다음의 몇 가지 세부양식의

변화는 후기의 변화까지 겸하여 고려할 때 주목할 만하다. 즉

쇠서의 형태, 3단첨차살미 모양의 삼분두형, 大樑 및 衝樑머리의 拳鼻形, 내부의 교두첨차,

同 3단째 樑捧形의 雙S形 의 重加變貌, 退高柱上의 보아지형, 화반형 등은 중기양식의 표준으로

간주된다.

 

      

 

 

      

 

        

 

       

 

 

 

 

2) 통도사 대웅전(通度寺 大雄殿)

 

- 건립년대 : 통도사는 우리 나라 3대 사찰 중 하나로 손꼽히는 큰 절로, 신라 선덕여왕 15년(646)에 자장율사가 세웠으나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조선 인조 23년(1645)에 다시 지은 것이다. 

 

- 구조개요 : 규모는 정면 3칸·측면 5칸이고, 지붕은 정면을 향해 T자형을 이룬 특이한 구성을 갖추고 있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계 양식으로 꾸몄다. 건물 바깥쪽 기단 부분과 돌계단 층계석, 계단 양쪽(소맷돌)부분에서는 통일신라시대의 양식을 이어받은 뛰어난 연꽃조각을 볼 수 있다. 

보통의 법당은 정면(도리칸)이 측면(보칸)보다 넓은 법이나 이 법당은 측면이 넓은 독특한 구조

이다.

內外陣으로 구성되었으나 고주의 일부는 생략하엿다. 따라서 大樑은 고주사이에 결구되기도 하

고 고주와 내목사이에 결구괴기도 하였다.

宗中樑은 대량위에 있되 4분,3분변작법에 따라 만들어 지지 않았다. 중대공이 고주 밖의 딴 선상

에 위치하였다. 이에 비하여 종량은 법식에 따라 가구되었다.

특색있는 이런 구조는 지붕의 형태를 고려한 데서 나온 것이다.
 

공포는 외 3출목, 내4출목으로 중기양식 치고는 出目數가 많은 건물이다. 

 

 

        

 

 

 

        

 

 

3) 법주사 팔상전(法住寺 捌相殿) 

 

- 건립년대 : 신라 진흥왕 14년(553)에 창건되어, 조선 인조 4년(1626)에 벽암선사(碧巖禪師)가 재건하였고, 최근(1968)에 완전 해체 복원공사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팔상전은 법주사의 오층목조 탑파건축(塔婆建築)으로, 1984년 4월 30일 쌍봉사의 대웅전으로 쓰이고 있던 삼층목조탑이 화재가 발생하여 없어지게됨으로써, 한국 목조탑(木造塔)의 유일한 실예(實例)가 된 중요한 건축물이다.

- 구조개요 : 1층과 2층은 정면 5칸 측면 5칸, 3·4층은 정면과 측면 3칸, 5층은 정면과 측면 모두 2칸의 정방형으로 되어 있고 지붕은 사모지붕으로 상부에 상륜부(相輪部)가 온전하게 갖추어져 있다. 공포(공包)의 양식(樣式)은 1층부터 4층까지는 기둥 위에만 공포를 짠 주심포식(柱心包式)이나, 5층은 주간(柱間)에도 공포를 짜 올린 다포식(多包式)으로 되어 있음이 주목된다. 내부 중앙에는 찰주(擦柱)의 심초석이 있어 이 위에 심주(心柱)를 세웠고, 이의 네 귀에 우고주(隅高柱)를 세웠다. 1층의 변주(邊柱)와 우고주를 연결한 퇴보 위에는 2층의 변주를 세웠다. 이러한 가구법은 목조탑의 전형이 아닌가 생각된다.

전체 높이는 기단부에서 상륜(相輪)까지 약 24m로서 현존하는 한국의 탑파 중에 제일 높은 것이다.

 

- 1968년 해체시 현장에서 세밀히 조사된 바로는  이 건물은 각층마다의 구조가 제각기여서 한

시대에 동시에 만들어진 건물이라고 보기는 매우 어려운 상태이다. 전후복구의 중건시, 또는

인조 때의 중수시에 편한대로 경비절감 등을 위하여 용도가 폐기된 건물들을   뜯어다 그 재목

으로 적절히 구성하였던 것 같다.

이런 점에서 이 건물의 가치는 그 법식이나 기법에 있지 않다.

        

 

 

       

 

       

 

       

 

 

 

4) 쌍봉사 대웅전(雙峰寺 大雄殿)

 

- 건립년대 : 쌍봉사는 우리나라 현존 유일의 3층 목탑식 전각이어서 보물로 지정되어 보호하여 왔으나 1984년 불에 타 다시 지었다

 

- 법주사 팔상전과는 달리 각층마다의 공포조작은 엄격한 규제로 통일성을 보이고 있어, 창작의

우수함을 나타내고 있으나 , 전자와 비교 할 때 회화적인 변화의 묘보다는 건조한 비례의 미가

더 우세한 초기적 경향이 강한 건물이라 하겠다.

 외부첨차살미의 牛舌形은 弧形으로 휘어 올라가서, 평방과 서까래 끝까지 연결하는 부드러운

소매깃 같은 역할을 하고 있고, 각 부재의 크기도 알맞은 치수를 가지고 있다.

또 중기의 특징으로는 3단째 첨차살미의, 예리하게 3각형으로 뻗은 초각수법과 4단째의 拳鼻形

初層첨차 내부가 翹頭形으로 간소하게 짤린 점 등을 들 수 있다.

 

                   

 

 

                                             1984년 화재이전 모습

 

 

5) 화엄사 각황전(華嚴寺 覺皇殿)

 

- 건립년대 : 화엄사는 지리산 남쪽 기슭에 있는 절로 통일신라시대에 지었다고 전한다. 조선시대에는 선종대본산(禪宗大本山) 큰절이었는데, 임진왜란 때 완전히 불타버린 것을 인조 때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원래 각황전터에는 3층의 장륙전이 있었고 사방의 벽에 화엄경이 새겨져 있었다고 하나,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만여점이 넘는 조각들만 절에서 보관하고 있다. 조선 숙종 28년(1702)에 장륙전 건물을 다시 지었으며, ‘각황전’이란 이름은 임금(숙종)이 지어 현판을 내린 것이라고 한다.

- 구조개요 : 이 건물은 신라시대에 쌓은 것으로 보이는 돌기단 위에 정면 7칸·측면 5칸 규모로 지은 2층 집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라 매우 화려한 느낌을 준다. 건물 안쪽은 위·아래층이 트인 통층으로 3여래불상과 4보살상을 모시고 있다.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인데, 벽쪽 사방으로 돌아가면서 경사지게 처리하였다.

 

중간포는 측칸에 1개, 어칸에 2개씩
공포는 상하층 모두 2출목.

 

목조건물에서 중층의 집을 지을 때 귀기둥이 담하는 역할이 매우 크다.

여기서는 내진의 귀기둥과 외진귀기둥이 45도 각도의 멍예로 결구되고 이 멍예위에 2층의 귀기둥

이 서있는 구조이다.

화엄사 각황전은 건물이 매우 웅장하며 건축기법도 뛰어나 우수한 건축 문화재로 평가받고 있다.


         

 

 

         

 

         

 

 

         

 

 

 

 

 

다포 건축양식의 架構圖(2-2) - 中期

 

1) 장곡사 하대웅전(長谷寺 下大雄殿)

- 건립년대 : 장곡사는 칠갑산에 있는 절로 신라 후기 보조국사가 세웠다고 한다. 자세한 연혁은 전하지 않으나 조선 정조 1년(1777) 고쳐 짓고 고종 3년(1866)과 1906년, 1960년에 크게 고쳐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구조개요 : 이 건물(建物)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비교적 작은 규모이지만 다포양식(多包樣式)의 특색을 갖추고 있다.
정면 중앙칸은 양쪽 협칸(夾間)에 비해 주칸(柱間)을 넓게 잡았으며, 지붕 구조는 맞배형식을 하고 있다. 이러한 다포의 맞배지붕 형식은 조선(朝鮮) 중기(中期), 즉 임진왜란(壬辰倭亂) 이후에 유행(流行)한 지방적(地方的)인 건축양식(建築樣式)인데 이 건물이 이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

 

소규모의 법당이지만 가구에 특색이 있다. 2間通이므로 고주를 세울 필요없이 대량을 바로

건너질렀다. 그 위로 종량을 얹었는데 이 법식이 통식에서 벗어난 것이다.

여기에서는 중대공을 생략하고 길이도 길게하여 아예 대량과 평행시키고 말았다.

종량이상은 우물반자로 가렸다.

 

대웅전은 내외2출목의 다포집이다. 다포집은 팔작이나 우진각 지붕이 보통인데 이 집은

맞배지붕이다. 다포의 맞배지붕일때  공포배열은 앞뒤에만 하는 유형과 측면에도 배열

하는 유형이 있는 데 이 법당은 후자의 유형에 속한다.

 

주심도리를 배치하지 않고 내목도리와 외목도리의 평형구조의 타당성을 증명하고 있다.

외출목 첨차살미의 牛舌形은 아직 강직하여 밑으로 뻗은 데서 약간 위로 휘어 올라간 것

같은 초기형을 따르고 있다.

주두나 소로의 형이 균형잡히어 아름다움을 잃지 않고 있다.

내부의 대들보를 지지하고 있는 보아지의 線刻形도 쌍S자형의 변화한 形이상으로 변화

되지 않고 있다.

기둥은 뚜렷한 배흘림이 눈에 뜨이며 창방머리의 線刻도 쌍S자형의 초기형을 그대로 보유하고

있다.

 

 

 

 

 

 

 

 

 

2) 범어사 대웅전(梵魚寺 大雄殿)

- 건립년대 : 경상남도 3대 절 중 하나로 유명한 범어사는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의상대사가 통일신라 문무왕 18년(678)에 처음으로 지었다고 한다. 또한 옛날 일본인이 침입했을 때에는 이곳의 승려들이 전쟁에 직접 참여하여 함께 싸우기도 했던 중요한 곳 중 하나로도 알려져 있다.

석가모니불상만을 모시는 일반 대웅전과는 달리 이곳 범어사 대웅전에는 미륵보살과 가라보살을 각각 석가모니의 왼쪽과 오른쪽에 함께 모시고 있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타버린 이 대웅전은 조선 선조 35년(1602)에 다시 지었으며 광해군 5년(1613)에는 한 차례 보수 공사가 있었다.

- 구조개요 : 이 대웅전은 정면(正面)과 측면(側面) 모두 3칸으로 된 맞배지붕의 다포(多包)집이다. 공포는 외3출목(外三出目)이고 옥내(屋內)에는 2개의 고주(高柱)를 세워 대량은 고주에 결구되고 후불벽(後佛壁)을 만들어서 그 앞에 불단(佛壇)을 설치하였으며 불단위에는 화려하게 장식한 닫집을 얹었다.

이 건물은 기둥머리와 두공(枓)과 처마의 구조가 섬려하고 아담한 교창(交窓)이 달렸으며, 닫집과 불단의 조각이 정교하고 섬세하여 조선(朝鮮) 중기(中期) 불교건축(佛敎建築)의 아름다움과 조선시대 목조공예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3)율곡사 대웅전(栗谷寺 大雄殿)

- 건립년대 : 율곡사는 신라 경순왕 4년(930)에 감악조사(感岳祖師)가 창건하였다고 전하는 절이다. 절과 관련된 고려·조선시대의 역사는 자세히 전하지 않지만 현재의 대웅전은 2003년 해체과정에서 어칸 종도리 하부에서 “강희십팔년기미월일상량기(康熙十八年己未月日上樑記)”의 묵서명 기록이 나와, 조선 숙종 4년(1679)에 대대적으로 중수(重修)되었음이 확인되었다.

- 구조개요 : 이 전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기와집으로, 다듬은돌 바른층쌓기의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민흘림 두리기둥을 세웠다. 공포(包)는 내(內)·외3출목(外三出目)으로, 기둥 위와 기둥 사이 평방(平枋) 위에 모두 짜올린 다포식(多包式)으로 되어 있다.

첨차(첨遮)가 내·외 모두 교두형(翹頭形)으로 조선 초기의 양식을 이루고 있으나 외목도리(外目道里)를 고정시키고 있는 조각(彫刻)의 모양으로 보아 조선 중기의 건축이라 추측된다.

       

 

 

 

 

       

 

 

       

 

 

 

 

4) 화엄사 대웅전(華嚴寺 大雄殿)

- 건립년대 : 화엄사는 지리산 남쪽 기슭에 있는 절로 통일신라시대에 지었다고 전한다. 조선시대에는 선종대본산(禪宗大本山)으로 큰 절이었고, 임진왜란 때 완전히 불탄 것을 인조 때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 중 절의 중심 법당인 대웅전화엄사의 건물 중 각황전(국보 제67호) 다음으로 큰 건물이다. 지금 있는 건물은 조선 인조 8년(1630)에 벽암대사가 다시 세운 것이라고 한다.

- 구조개요 : 규모는 앞면 5칸·옆면 3칸이고,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건물 안쪽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만든 우물 천장이며, 삼존불 위쪽으로 장식적인 성격을 띠는 지붕 모형의 닫집을 놓아 엄숙한 분위기를 한층 높이고 있다.

규모도 크고 아름다우며 건축 형식의 특징과 균형이 잘 잡혀있어 조선 중기 이후 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는 건물이다.

         

 

 

      

     

 

 

5) 무량사 극락전(無量寺 極樂殿)

- 건립년대 : 무량사는 신라 말에 범일이 세워 여러 차례 공사를 거쳤으나 자세한 연대는 전하지 않는다. 다만 신라말 고승 무염대사가 일시 머물렀고, 고려시대에 크게 다시 지었으며, 김시습이 이 절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 구조개요 : 이 건물은 중층(重層)으로 된 불전(佛殿)으로 무량사(無量寺)의 중심 건물이다. 얕은 기단 위에 높직한 기둥을 세워 하층평면(下層平面)을 구성하고, 상층(上層)은 하층(下層)의 내진기둥(內陣柱)을 높여 상층기둥이 되어 내부공간(內部空間)을 높고 시원하게 처리하였다.

주간(柱間)은 하층이 정면 5칸 측면 4칸이며, 상층은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기둥 위에 짜여진 공포(공包)는 다포식(多包式)으로 18세기에 유행하던 세부기법(細部技法)을 나타내고 있다. 이 건물은 우리나라에 흔하지 않은 중층의 건물로도 중요하지만, 가구기법(架構技法)과 세부수법(細部手法)이 견실하고 외관이 장중한 중층 건물의 대표적 건물이라 할 수 있다.

       


6) 전등사 대웅전(傳燈寺 大雄殿) 

- 건립년대 : 이 대웅전은 1916년 수리시 발견된 양간록(樑間錄)에 의하면 선조(宣祖) 38년(1605) 일부 불탔으며, 다시 광해군(光海君) 6년(1614)에 불이나 모두 타버림으로써, 다음해(1615) 공사를 시작하여 광해군 13년(1621)에 거의 완공을 본 것으로 되어 있다.
한편 『전등본말사지(傳燈本末寺誌)』에는 철종(哲宗) 6년(1855) 규영화주(奎塋化主)에 의해 중건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 구조개요 :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팔작집으로 막돌 허튼층쌓기한 높은 기단(基壇) 위에 막돌 초석을 놓고 민흘림 두리 기둥을 세워, 공포를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짜올린 다포식(多包式) 건축이다.

공포의 짜임은 외2출목(外二出目) 내4출목(內四出目)으로 되었고, 쇠서(牛舌)의 모양은 섬약하며, 귀공포에는 나무로 깎은 인물상(人物像)을 얹어 놓은 것이 특이하다.

내공포의 공간포(空間包)는 첨차(첨遮)가 교두형(翹頭形)이나 주상(柱上)에서는 초각(草刻)된 판형(板形)으로 되어 있어 눈길을 끈다.

     

  

7) 전등사 약사전(傳燈寺 藥師殿)

- 건립년대 : 이 약사전의 창건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며 다만 '대웅전약사전개와중수기(大雄殿藥師殿改瓦重修記)'에 고종(高宗) 13년(1876)에 기와를 바꾸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 구조개요 : 이 전각의 건축양식은 조선(朝鮮) 중기(中期)의 다포식(多包式)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팔작집이다. 장대석쌓기를 한 기단 위에 막돌 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에는 약한 배흘림이 있다. 공포(공包)는 외1출목(外一出目) 내2출목(內二出目)으로 초제공(初齊工)과 이제공에 놓이는 살미첨차(山彌첨遮)의 끝은 모두 앙서(仰舌)로 되었고, 안쪽은 기둥 위에 놓이는 공포에서는 판형(板形)으로 되어 초각(草刻)을 하였으나, 기둥 사이의 공포에서는 교두형(翹頭形)을 취하고 있다.

이 전각의 특징은 다포식 건축이면서도 창방(昌枋)위에 평방(平枋)이 놓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포 건축양식의 架構圖(3-1) - 後期

1) 서울 東大門

- 건립년대 : 서울 성곽은 옛날 중요한 국가시설이 있는 한성부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도성(都城)으로, 흥인지문은 성곽 8개의 문 가운데 동쪽에 있는 문이다. 흔히 동대문이라고도 부르는데, 조선 태조 7년(1398)에 완성하였다가 단종 원년(1453)에 고쳐 지었고, 지금 있는 문은 고종 6년(1869)에 새로 지은 것이다.

- 구조개요 :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모양을 한 우진각 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인데, 그 형태가 가늘고 약하며 지나치게 장식한 부분이 많아 조선 후기의 특징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또한 바깥쪽으로는 성문을 보호하고 튼튼히 지키기 위하여 반원 모양의 옹성(甕城)을 쌓았는데, 이는 적을 공격하기에 합리적으로 계획된 시설이라 할 수 있다.

흥인지문은 도성의 8개 성문 중 유일하게 옹성을 갖추고 있으며, 조선 후기 건축 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2) 내소사 대웅보전(來蘇寺 大雄寶殿)

- 건립년대 : 내소사는 백제 무왕 34년(633)에 혜구두타(惠丘頭陀)가 세운 절로 원래 이름은 소래사였다고 한다.

대웅보전은 아미타여래를 중심으로 우측에 대세지보살, 좌측에 관세음보살을 모신 불전으로 조선 인조 11년(1633) 청민대사가 절을 고칠 때 지은 것이라 전한다.

- 구조개요 : 규모는 앞면 3칸·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위부분에 짜은 장식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인데, 밖으로 뻗쳐 나온 부재들의 포개진 모습은 우리 옛 건축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공포는 외 3출목으로 길게 뻗은 쇠서가 겹겹으로 처마밑을 향하여 소매깃의 역할을 하고 있고

내부 5출목으로 이들의 첨차살미에는 길게 돌출한 蓮봉을 조각하였다.

대들보에 걸린 충량머리와 추녀 밑 첨차 상단에는 龍頭를 새겨 넣었다.


벽체 윗부분에 있는 부재 끝을 연꽃 봉오리 모양으로 장식하였고 충량머리에는 용이 물고기를 물고 있는 모습을 나타내 건물의 화사함을 더해 준다.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짜맞추어 지붕 윗부분을 가리고 있는 우물천장으로 꾸몄다.

 

또한 앞쪽 문에 달린 문살은 꽃무늬로 조각하여 당시의 뛰어난 조각 솜씨를 엿내소사는 백제 무왕 34년(633)에 혜구두타(惠丘頭陀)가 세운 절로 원래 이름은 소래사였다고 한다

공예로 가치가 높은 문살 조각과 독창적인 장식물 등 조선 중기 이후의 건축 양식을 가늠할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건물이다.

 

 

 

 

 

3) 풍남문(豊南門)
- 건립년대 : 조선시대(朝鮮時代) 관찰사(觀察使)의 소재지(所在地)였던 전주에는 시가지를 둘러싼 성곽(城郭)이 초기부터 있었으며, 그 성곽에는 동서남북(東西南北)에 각각 문(門)이 있었는데 선조(宣祖) 30년(1597) 정유재란(丁酉再亂)때에 모두 파괴되었다.

성곽과 성문이 다시 수축(修築)된 것은 영조(英祖) 10년(1734)이며 이때 남문(南門)을 명견루(明見樓)라 하였다. 그러나 명견루는 영조 43년(1767) 큰 화재로 불타버렸다. 현재의 문루는 그 이듬해에 당시의 관찰사(觀察使) 홍낙인(洪樂仁)이 재건한 것으로 풍남문(豊南門)이란 이름도 이때 붙인 것이다. 그후 순종(純宗) 융희(隆熙) 원년(元年)(1907) 도시계획의 일환(一環)으로 성곽과 성문은 모두 철거되고 이 풍남문만 남게 되었다.

풍남문은 그후 종각(鐘閣), 포루(砲樓) 등이 일부 헐리고 지면(地面)이 묻히는 등 그 옛모습이 크게 훼손(毁損)되었는데 지난 1978년부터 3년간의 보수공사로 다시 그 원모습이 드러나게 되었다.
- 구조개요 : 규모는 1층이 앞면 3칸·옆면 3칸, 2층이 앞면 3칸·옆면 1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다. 평면상에서 볼 때 1층 건물 너비에 비해 2층 너비가 갑자기 줄어들어 좁아 보이는 것은 1층 안쪽에 있는 기둥을 그대로 2층까지 올려 모서리기둥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이 같은 수법은 우리나라 문루(門樓)건축에서는 보기 드문 방식이다.

부재에 사용된 조각 모양과 1층 가운데칸 기둥 위에 용머리를 조각해 놓고 창방 위에는 鬼面 또

는 蓮花文華盤을 만들어 놓은 점들은 장식과 기교를 많이 사용한 조선 후기 건축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이 門의 특징은 주심포집과 다포집의 혼성으로 이루어진 점이다.

       

 

       

 

       

 

 

 

4) 보현사 대웅전(普賢寺 大雄殿)

- 건립년대 : '普賢寺事蹟記'에는 初創은 고려 제5대 景宗王之三年(978)으로 되어 있고, 最終으

로 乾隆二十六年辛巳(1761)에 失火된 것을 慧信大師가 重創하였다.

 

- 구조개요 : 이 건물은 정면 5칸 측면3칸이며 팔작지붕에 배흘림 기둥이다.

공포는 외 3출목 내 5출목으로 모두 내소사 대웅전과 유사한 세부수법으로 되어 있다.

                           

 

 

 

5) 신륵사 극락전(神勒寺 極樂殿)

- 건립년대 : '事蹟記'에 의하면 정조21년 丁巳年(1797)에 시작하여 嘉慶5년(1800)에 완공을 본

건물이다.

 

- 구조개요 : 공포는 외 3출목 내 4출목으로 첨차살미의 牛舌形은 지극히 복잡하다.

쇠서 상단에 큰蓮봉을 올려놓고 내부는 동대문에서 본 것 같은 운공이 우물천장 밑끝까지 뻗어

올라가 있다. 같은 경내에 있는 祖師殿과는 현저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다포 건축양식의 架構圖(3-2) - 後期

 

1) 석왕사 대웅전(釋王寺 大雄殿)

- 건립년대 : 서산대사의 〈설봉산석왕사기〉에 의하면, 이성계는 등극하기 전에 왕업을 이루기 위한 기도처로서 응진전(應眞殿)을 세워 오백나한재를 개설하였고, 이때에 천진당·진헐당·인지료·용비루 등을 지었다.

또 왕이 된 뒤에 거찰을 이룩하였으며, 1401년(태종 1)에는 이곳에 와서 동구에는 소나무를, 뜰에는 배나무를 심었다. 그뒤 왕명에 의하여 이곳의 소나무를 베는 것을 금하였고 좋은 배를 임금에게 바치게 하였다.

 

1732년(영조 7)에는 대웅전과 영월루, 흥복루, 범종루, 용비루, 조계문 등을 개수하였다. 31본산 시대에는 대웅전, 응진전, 팔상전, 명부전, 해장전, 극락전, 석왕사, 인지료, 신한각, 운한각, 천서각, 만춘각, 백련당, 진헐당, 심검당, 군당, 보명전, 연빈관 등을 갖춘 대가람이었으며, 48개의 말사(末寺)를 관장하고 있었다.

 

- 구조개요 :석왕사의 중심 건물인 대웅전은 1951년에 소실되었지만, 일제시대의 자료인 《조선고적도보》12권에 사진으로 그 흔적이 남아 있다.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다포계 팔작집이며, 기둥에 배흘림이 있고, 공포의 화두자 장식, 금모로단청 장식 등으로 보아 조선 후기양식의 건축물로 추정된다.

 

공포조작을 보면 외4출목 내5출목이라는 유례없는 출목수를 가지고 있고 내외 쇠서형태

또한 극단으로 장식화한 절정의 작품이다.

외부첨차의쇠서는 S형으로 굽어 위로 치솟아 각단의 쇠서첨단은 사선으로 연결되어 처마

밑을 받들도록되어 있고, 쇠서뿌리에는 화려한 蓮봉을 조각하고 최상단에는 龍頭를 돌출

시키고 있다.

출목수는 많고 中間包도 비교적 좁은 간격으로 배열되어 완전히 構體와 屋蓋 사이에, 별

도의 의미를 가진 부분을 형성하고 있다

                 

                     

 

 

 

2) 신계사 대웅전(神溪寺 大雄殿)

- 건립년대 : 신계사는 원래 대웅전을 중심으로 그 앞에 현존하는 삼층석탑이 있고, 그 동측에 칠성각, 대향각, 극락전이, 서쪽에는 나한전, 어실각이 배치되어 있었으며, 남북 축선 상 남쪽에 만세루가 있었는데 그 좌·우에는 향로전과 최승전 그리고 부속건물들이 있었다. 이 건축물들은 한국전생시에 모두 소실되었으나, 현재 조계종에 의해 2004년 대웅보전이 복원되었고 나머진 건물들은 복원 진행 중이다.
신계사 대웅보전은 임진왜란 후(1597년) 중창한 것을 1887년(고종 24)에 중수한 것으로, 유점사 능인보전과 함께 북한의 조선시대 말기 사찰건축을 대표하는 것이었다.

 

- 구조개요 : 대웅전은 정면 3칸(12.45m), 측면 3칸의 다포계 팔작지붕으로 어칸이 협칸보다 넓다. 기둥은 민흘림으로 되어 있고, 외 9포, 내 13포의 높은 두공을 짜올린 포식건물이다.

기둥 위에는 안팎을 관통한 용틀임조각을 놓고 그 위에 두공을 짜올렸는 데 첨차는 꽃가지형이다. 길게 휘여내민 쇠서형 살미들과 그 위에 활짝 핀 연꽃과 꽃 봉우리를 엇바꾸어 가며 덧붙였다. 안쪽의 제공도 연꽃봉오리와 활짝 핀 연꽃으로 장식하였는데 층마다 그 형태가 다르다.

공포의 연화와 연봉 조각은 조선후기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건물 전체의 품격을 부여하는 대웅전의 화려한 두공은 조각장식의 원숙함에 있어 같은 형태의 두공인 표훈사 반야보전의 것을 능가하고 유점사 능인보전에 가깝다. 이러한 차이는 이 건물의 시대적 차이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복원공사중(사진 :한국일보)

            

 

                                                                                    

                                                                                        (사진출처 : 메뎅이 블로그)

 

3) 건봉사 대웅전(乾鳳寺 大雄殿)

- 건립년대 : 건봉사는 일제때의 행정구역으로 고성군 오대면 냉천리로 되어 있으나 지금은 거진읍 냉천리로 되어 있으며 세칭 한국 4대사찰이라 이르던 대찰(大刹)이었으나 6.25동란 전후로 수백칸의 가람이 다 불타 버리고 지금은 당시 건조물미불이문 한칸과 능파교와 석계(石階), 초석(礎石), 부도(浮屠)등이 남아 있었으나 1990년도 대통령 공약사업으로 지표조사를 마치고 사지정비와 대웅전, 팔상전, 염불만일원, 동지전, 명부전 등의 건물을 새롭게 복원했다.

 

- 건봉사의 事蹟에는 이 대웅전이 高宗年間에 건립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柱上에 있는 거대

한 龍頭形이나 첨차 상단에 있는 鷲頭形, 내부에 있는 복잡한 雲工과 蓮봉 紋刻과 용두는 여실히

이를 증명하고 있다. 

                    

 

                         

 

 

4) 동화사 대웅전(桐華寺 大雄殿)

- 건립년대 : 동화사(桐華寺)는 신라시대(新羅時代)에 창건(創建)된 후 8차례의 중창을 거듭하였으며, 대웅전 역시 여러 차례의 중창(重創)을 겪었다. 현재의 건물(建物)은 조선(朝鮮) 후기(後期)인 영조(英祖) 3년(1727)에서 영조 8년(1732) 사이에 건립(建立)된 것으로 추정(推定)된다.

 

- 구조개요 :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식(多包式) 팔작지붕 건물로 공포(공包)는 내5출목(內五出目), 외3출목(外三出目)이며 바깥의 제공(諸貢) 쇠서끝이 날카로운 곡선(曲線)을 나타내고 있다. 내부(內部) 첨차(첨遮)도 한몸으로 초각(草刻)되고 끝이 뾰족한 연꽃봉오리로 장식(裝飾)되어 조선 후기의 일반적(一般的)인 장식적(裝飾的) 성향(性向)을 보여준다. 이 건물에서는 정면의 꽃살 문짝과 모서리 기둥이 주목된다. 문짝은 솟을빗살에 활짝 핀 꽃잎을 색색으로 새기고 그 바탕에 네 개의 잎을 배열(配列)시키는 등 장엄한 장식을 하였고, 기둥은 가공(加工)하지 않은 아름드리 나무를 그대로 세워 건물의 안정감(安定感)과 자연미(自然美)를 나타내고 있다.

 

 

 

5) 은해사 대웅전(銀海寺 大雄殿)

- 건립년대 : 은해사는 신라(新羅) 헌덕왕(憲德王) 원년(元年)(809) 혜철국사(惠哲國師)가 현 운부암(雲浮庵) 아래 해안평(海眼坪)에 해안사(海眼寺)로 창건되었으나 조선(朝鮮) 인종원년(仁宗元年)(1544)에 대화(大火)를 입어 명종원년(明宗元年)(1545)에 천교화상(天敎和尙)이 현위치로 옮겨 중창하였다. 그러나 명종(明宗)18년(1563)의 대화(大火)와 그 후 수차례의 화재로 건물이 많이 소실되었다.

1919년 지석담주지(池石潭住持)에 의해 대중창이 이루어져 현재의 틀을 갖추게 되었으나 근년에 대대적인 중창불사로 과거의 모습은 많이 잃었다.

- 구조개요 :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이며 내부는 우물마루를 깔고 내진주(內陣柱)에 의지해 불단(佛壇)을 만들었다. 정면 창호구성을 보면 어칸은 4짝 여닫이문으로 좌우협칸은 3짝 여닫이문을 달았다. 구체부, 즉 주고를 높게 잡은 관계로 문높이가 높아 정첩이나 돌저귀로 지지하기가 어려웠던지 내측에 둔테를 달아 개폐토록하였으며, 개폐방식도 독특하다. 그리고 좌, 우측면 전면칸에 외짝여닫이문을 두고 배면어칸에도 문을 설치하였으나 좌측면 문은 후면칸에 설치되었으나 근년에 전면쪽으로 옮긴 듯하다.

기둥상부는 창, 평방을 설치하고 정면 주간포(柱間包)는 2구(區)씩, 측면 주간포는 1구씩을 얹은 다포작(多包作)으로 꾸몄으며, 공포구성은 외(外)4출(出) ·내(內)6출목(出目)이다.

일반적으로 내출목이 외출목보다 1출목 정도 더 설치되는 것이 상례인데 반해 여기서는 2출목을 더 설치하여 지붕구배를 급하게 잡았다. 이는 사찰이 자리한 부지가 평지인 경우 자주 채택되는 법식으로 건물고를 높이기 위한 방편으로 보여진다.

불단상부는 낙양각이 조각된 보개(寶蓋)를 얹고 용(龍) 과 단조(단鳥) 및 비천상(飛天像)으로 장식하였으며 대량(大樑)위에 걸친 충량(衝樑)머리는 용두(龍頭)를 조각하였는데 조선말기의 과장된 수법이다.

천장은 외진(外陣)쪽으로는 공포의 경사에 따라 빗반자로 처리하고 내진(內陣)은 어칸엔 소란반자를, 협칸은 우물반자로 처리하여 중앙부분을 강조하였으며, 단청은 금단청(錦丹靑)으로 영남지방(嶺南地方)의 전통적인 색조를 띄우고 있으나 내부(內部) 포벽(包壁)의 불화(佛畵) 등의 처리는 조잡하다.

   

 

 

 

 

 

 

 

  주심포 집

 

주심포집 柱心包-

 

▣ 주심포식

   고려말 건물로 현존하는 것은 봉정사 극락전(1897년 수리공사시 묵서명이 발견되었는데 1363년 지붕 보수가 있었다는 기록이 발견됨.  이 건물은 13세기로 추정), 부석사 무량수전 (1376년 중건 기록이 있으나 13세기로 추정), 수덕사 대웅전(1308), 강릉 객사문(14세기), 부석사 조사당(1377년),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1375년)등이며, 북한에는 성불사 극락전(1321년 창건, 1530년, 1644년 중건, 1950년 전쟁 피해, 전후복구, 퇴간은 조선시대 후 보수), 응진전(1327년 창건, 1530년 중건) 등이 있다. 조선시대 초기 건물로는 삼척 죽서루(1403년), 무위사 극락전(1430년), 관룡사 약사전(1473년), 송광사 하사당(15세기) 및 국사전(15세기), 도갑사 해탈문(1473년) 등이 있다. 위의 건물들은 13세기에서 15세기의 건물로 중국의 신양식이 도입되는 중요한 시기이며, 이들 건물을 중심으로 그 특성을 알아보기로 한다.

우선 축부에서

1. 기둥의 경우

· 기둥에 배흘림이 있는 것 ; 봉정사 극락전 외 대부분

· 기둥에 배흘림이 없는 것 ; 송광사 국사전(가장 약함)


2. 창방 뺄목의 형상

· 뺄목 끝을 직절(直切)한 것 ; 봉정사 극락전

· 뺄목 끝을 초각(草刻)한 것 ; 수덕사 대웅전, 강릉 객사문, 송광사 국사전 및 하사당, 무위사 극락전

· 뺄목이 없는 것 ; 무석사 부량수전

· 뺄목이 첨차형 ; 부석사 조사당 


공포의 구성 내용을 보면

1. 주두의 경우

· 주두의 굽이 곡선인것 ; 봉정사 극락전

· 주두의 굽이 곡선이고, 굽받침이 있는 것 ; 부석사 무량수전, 수덕사 대웅전, 강릉 객사문

· 주두의 굽이 사절(斜切)되고, 굽받침이 없는 것 ; 부석사 조사당 외 대부분의 건물

2. 두공의 경우

· 두공이 도리 방향이고, 살미 첨차는 보 방향인 것 ; 수덕사 대웅전

· 도리 방향은 두공이고, 보 방향은 교두형 첨차인 것 ; 봉정사 극락전, 부석사 조사당

3. 헛첨차의 경우

· 헛첨차가 없는 것 ; 봉정사 극락전, 부석사수석사 무량수전

· 헛첨차가 있는 것 ; 수덕사 대웅전, 강릉 객사전, 은해사 거조암 연산전, 부석사 조사당, 무위사 극락전, 송광사 하사당 및 국사전, 정수사 법당 등 다수

4. 행공첨차의 경우

· 행공첨차가 있는 것 ; 부석사 무량수전, 수덕사 대웅전, 강릉 객사전, 무위사 극락전, 송광사 하사당 및 국사전, 정수사 법당, 관룡사 약사전 등 다수

· 행공첨차가 없고 단장여만 있는 것 ; 봉정사 극락전

· 행공첨차가 없이 통장여가 직접 외목도리를 받치는 것; 부석사 조사당, 도갑사 해탈문

5. 주심에서의 첨차짜임

· 소첨위에 대첨을 놓은 것 ; 부석사 무량수전(예가 드뭄)

· 중공 위에 장여를 놓고, 소첨을 놓은 것 ; 부석사 무량수전

· 소첨만을 놓고 정여 위에 소첨을 놓은 것 ; 수덕사 대웅전, 봉정사 극락전


    가구의 구성 내용을 보면

    1. 도리와 보와의 관계

    · 보 위에 직접 도리를 얹은 경우; 수덕사 조사당, 무위사 극락전

    · 보와 도리를 분리한 경우; 봉정사 극락전, 수덕사 대웅전, 부석사 무량수전,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 강릉 객사문

    2. 내부 공간의 구성

    · 고주를 세운 경우

      - 1고주 ; 봉정사 극락전

      - 2고주 ; 부석사 무량수전, 수덕사 대웅전,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

    · 고주가 없는 경우; 부석사 조사당, 무위사극락전, 송광사 국사전

    3. 대공의 형상

    · 화반대공 ; 봉전사 극락전, 무위사 극락전, 송광사 하사당

    · 포대공 ; 부석사 무량수전, 수덕사 대웅전, 강릉 객사문, 부석사 조상당 (종보는 판대공),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종보위에 동자대공), 도갑사 해탈문

    · 판대공 ; 관륭사 약사전(대들보위 포대공)

    · 동자대공; 송광사 국사전(종보위 판대공)

    4. 합장재의 유무

    · 솟을합장을 사용한 것 ; 봉정사 극락전, 부석사 무랑수전, 수덕사 대웅전, 성불사 극락전, 부석사 조사당,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 무위사 극락전, 도갑사 해탈문

    · 솟을합장이 없는 것 ; 강릉 객사문(원래 있었을 가능성이있다.) , 관룡사 극락전, 송광사 국사전 및 하사당

    5. 천정의 형상

    · 연등천정; 봉정사 극락전 외 대부분

    · 우물천정; 무위사 극락전(후보수 가능성), 송광사 국사전(후보수 가능성)

       위의 내용은 고려말에서 조선 초의 주심포식 건물이 가지고 있는, 서로 같거나 다른 부분들을 비교하기 위해 나열해 본 것들이다. 이들 요소에서 각 주심포식 건물들이 가지고 있는 대체적인 윤곽이 나타나고 있다. 이렇게 구분해 본 것은 서로 다른 건물들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 수 있고, 나아가 서로 다른 건물군들 간의 흐름을 알 수 있는 기초적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이들 내용을 종합하면 대개 아래와 같은 사항을 파악할 수 있다.

       축부에서 기둥의 배흘림 내용을 보면, 주심포식은 봉정사 극락전을 비롯한 대부분의 건물에 이 기법이 보이며, 특히 배흘림의 현저함은 고려말 건물에 두드러진다. 16세기 이후부터는 배흘림의 기법이 차차 쇠퇴하여 가는 경항을 볼수 있다.

       창방의 뺄목 내용을 보면,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봉정사 극락전은 뺄목을 직절하여 아무런 초각이 되어 있지 않았다. 또 부석사 무량수전은 뺄목이 없는 것이 특징이며, 이는 오히려 봉정사 극락전보다 앞선 기법을 보여준다. 이들 건물 외의 건물은 거의 뺄목끝을 조각하였고, 이 기법은 계속 후대에 계승되고 있다. 부석사 조사당을 보면, 뺄목이 첨차처럼 되어 측면의 헛첨차 역할을 하고 있어 특이하다.

       다음 공포 구성의 내용을 보면, 우선 주두와 소로의 형상에서 세가지 유형이 보이는데 봉정사 극락전은 주두굽이 곡면을 갖는 형상이고,  부석사 무량수전을 비롯하여 수덕사 대웅전, 강릉 객사문 등은 모두 봉정사 극락전 주두 모양에 굽받침을 갖고 있는 형식으로 이러한 주두 모양은 고려 말에서만 보인다.  또 하나의 주두 모양은 다포건축에서 흔히 볼수 있는 굽 모양이 사절된 주두 모양으로 부석사 조사당에 보이며, 이 기법은 조선시대 주심포식에 널리 보급된다.

       주두위에 놓이는 두공의 형식은 주두 위에 십자형을 짜는데, 이러한 열십자형 첨차를 두공이라 한다. 한국건축에서는 보 방향의 두공은 두공첨차라 하며 도리방향의 두공을 산미첨차라고 하며 도리 방향의 두공은 두공 첨차라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주심포식 공포에서 이 두공의 형상이 두 가지로 나타나는데, 그 하나는 산미첨차 선단에 의장용 조각을 한 것이고, 수덕사 대웅전에 이 형상이 보이며, 또 하나는 도리 및 보 방향의 첨차를 동일도리 및 보 방향의 첨차를 동일한 형식으로 한 것인데, 이러한 것은 봉정사 극락전과 부석사 무량수전, 부석사 무량수전의 경우에는 도리 방향의 두공이 소첨과 대첨이 중첩된 소위 중공(重 )형식이며, 그 위에 장여를 보내고 그 위에 다시 첨차를 올려놓고 있어 다른 건물과 다르다.

       수덕사 대웅전은 두공이 도리 방향의 단공이고, 그 위에 장여, 그리고 장여 위에 첨차가 하나 놓여 부석사 무량수전과 동일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헛첨차는 봉정사 극락전과 부석사 무량수전을 제외하고는 모두 엇첨차를 갖고 있다. 고로 헛첨차가 없는 건물이 옛식인 것만은 틀림없다. 그러나 이 헛첨차의 원류가 어디에 있는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 공포의 최선단 상부에는 외목도리가 얹히는데  이 도리 바로 밑에는 장여가 받치고, 장여 밑에는 행공첨차가 있는 것이 일반적인 구성방법인데 행공첨차가 없는 건물이 있다. 이러한 건물은 봉정사 극락전과 부석사 조사당, 도갑사 해탈문 등인데, 이 중에서도 봉정사 극락전만이 단장여로 되었고, 나머지 두 건물은 통장여로 되었다. 행공첨차가 없는 공포는 중국에서 말하는 완전한 투심조(偸心造) 이며 행공첨차가 있다할지라도 투심조적성격의 공포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가구의 내용을 보면, 우선 도리와 보와의 관계에서 보 위에 직접 도리를 얹는 경우와 보와 도리가 분리되어 있는 두가지 경우가 있다. 전자의 경우는 부석사 조사당, 무위사 극락전 등에서 보이며, 후자의 예는 봉정사 극락전을 비롯하여 부석사 무량수전, 수덕사 대웅전, 강릉 객사문,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 등 고려기 건물의 대부분에서 볼 수 있어 고려기 주심포 건물이 가지는 하나의 특성이라 할 수 있다.

       건물 내용의 고주 사용은 1고주,  2고주의 예가 보이는데, 1고주는 봉정사 극락전, 2고주는 부석사 무량수전, 수덕사 대웅전,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 등이며 고주가 없는 건물로는 부석사 조사당, 무위사 극락전, 송광사 국사전이 그 예이다.

       보 위의 대공 내용을 보면, 크게 4가지유형으로 나눌 수 있는데, 그 분류는 화반대공, 포대공, 판대공, 동자대공이다. 화반 대공과 포대공은 주심포식의 특색으로 대부분의 건물들이 이 두 가지 대공을 사용하였으며, 판대공과 동자대공은 주심포식 건물에서는 사용예가 드물다. 또한 솟을 합장역시 고려기 건물이 주심포식에서는 대부분 보이며, 조선 초기에 들어와서 차차 소멸하는 경향이다.  천정은 연등천정이 대다수이며, 조선초기의 것에 보이고 있는 우물천정도 후대에 부가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상에서 고려말 조선초기의 주심포식 건물의 내용들을 중요부분만 개괄하여 보았다.

      홍성 고산사 대웅전. 충남 홍성군 결성면 무량리. 보물 제399호.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3칸 단층 팔작지붕의 주심포집이다. 두산세계대백과사전 사진

    홍성 고산사 대웅전

        
    전통 목조건축 양식.

    매우 큰 양간(樑間)을 가지고 건물 내부에 기둥이 없는 넓은 공간을 만드는 데 적합한 가구(架構) 수법을 사용한 건축으로 두공(枓栱)의 장설(長舌)를 최대로 활용한 건물이다. 우선 기둥 위에 주두(柱頭)를 놓고 주두 위에만 두공을 짜올리며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동자주(童子柱) 아니면 ∧형 복화반(覆花盤)을 둔다.

    두공은 기둥머리의 창방 위치에 꽂아낸 첨차(檐遮)부터 시작해서 짜올리며, 벽 전면에서 외목도리(外目道里)를 받기 위한 행공첨차(行工檐遮) 이외에는 좌우로 전개되지 않는다. 두공은 2출목으로 한정되며 첨차의 하단은 S형 곡선이 되도록 깎는다.

    소루(小累)는 측면이 내반(內反)된 곡선이 되고, 굽 밑에 굽받침이 달리게 된다. 보[樑]의 형태는 네모가 둥글게 깎인 역사다리꼴이 되고, 보 양 끝에서는 보의 굵기가 작아진다. 천장가구(天障架構)는 회칠이나 단청으로 꾸미고 일반적인 천장가구를 하지 않는다.

    이 주심포 양식은 원래 중국 화남지방에서 성행하던 것으로, 한국과 교류하는 과정에서 전해져 재래의 목조건축에 이용되면서 점차 본고장인 화남지방의 주심포집과는 다른 양식으로 확립되어간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한국 주심포양식의 가장 오래된 건물이 부석사 무량수전(無量壽殿)인데 이 무량수전은 신라·고려로 이어지는 매우 기능적인 건축양식과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지만, 중국 화남과는 차이가 많은 건물인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부석사 무량수전이 한 조형(祖形)이 되어 이 계통의 목조건축이 조선 전기에 가장 성행하였으며, 중기와 후기에도 한국 법당(法堂) 건축에 사용되어 왔다.


    봉정사 극락전의 귀공포. 고려 시대 대표적인 주심포계 양식의 건물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진

    송광사 국사전의 주심포. 전남 순천시 송광면 신평리 송광사에 있는 조선 시대의 불전. 국보 제56호. 건물내부 전체에 걸쳐 井자 천장이 가설된 주심포 양식이 특징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진
    송광사 국사전의 주심포


    고구려 고분벽화에 보이는 여러 가지 공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진

    목조건축양식인 공포(栱包)의 일종. 공포가 기둥머리 바로 위에 받쳐진 형식을 말한다.

    [고대 삼국시대]

    목조건축양식인 다포계(多包系)·익공계(翼工系)보다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주심포양식은 고구려 벽화고분에 보이는 그림을 통하여 삼국시대부터 사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삼실총(三室塚)·산연화총(散蓮花塚)·환문총(環文塚) 등은 벽체와 천장이 연결되듯이 2단 혹은 3단을 점차로 내밀면서 상부를 펼쳐 받쳤으며, 특히 환문총은 곡선을 이루며 단(段)을 이루고 있다.

    다음 대성리제2호분(臺城里第二號墳)과 약수리벽화고분(藥水里壁怜古墳)은 완전한 기둥과 상부의 보를 연결하는 주두(柱枓)를 표현하였고, 또 무용총(舞踊塚)·각저총(角抵塚)·구갑총(龜甲塚)은 엔타시스(entasis : 배흘림) 있는 기둥 위에서 굽받침 있는 주두를 올렸고 이 위에 첨차(檐遮)와 소로를 한 단씩 얹어 주심포를 형성하고 있다.

    용강대총(龍岡大塚)·쌍영총(雙楹塚)·안악제1호분 (安岳第一號墳)은 소첨차 위에 대첨차를 놓고 2중첨차의 공포형식을 이루어 적어도 출목(出目) 하나 이상을 두고 있는 발전된 주심포양식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나타나는 특징은 주두나 소로굽이 곡을 이루고 있고 굽받침이 있는 경우가 있으며, 첨차가 교두형(翹頭形 : 활모양 또는 圓弧형으로 깎아낸 모양)으로 되어 있으면서 첨차단이 수직으로 곧게 잘리다가 밑에서는 안으로 비스듬히 잘려 있다. 또 첨차 윗부분에는 공안(栱眼 : 첨차의 상부 소로와 소로 사이 윗면을 활형으로 깎아내거나 어깨의 옆면을 조금 파낸 것, 또는 그 부분)이 있다.

    배흘림은 '나란한 직선은 가운데로 휘어 보이는 착시 현상 일으키는 것'을 교정하고자 한 것으로 '건물의 시각적 안정감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며 고려시대와 조선 초기의 주심포계와 다포계의 건물에 주로 사용되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인 안동 봉정사의 극락전 ,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의 기둥도 수덕사의 대웅전처럼 배흘림(엔타시스) 양식을 하고 있다.


    [백제시대]

    백제시대의 것은 현재 흡족한 자료가 없고 다만 국립부여박물관에 있는 백제청동소탑(百濟靑銅小塔)의 예와 백제인이 도일(渡日)하여 세웠다는 일본의 호류사(法隆寺)의 건물들을 보아 대강 추측이 되는데, 앞서 말한 소탑에서는 명확한 공포구조를 나타내고 있지 않아 그 특징을 말할 수 없겠으나, 다만 기둥 위에 주심포양식의 공포를 가지고 있으며 호류사 금당에서 보는 것과 같은 하앙(下昻)과 살미받침 두공이 빠져나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호류사 금당에서는 창방 위에 짜여진 첨차의 소로와 살미두공이 구름모양을 하고 있다는 것과 주두에 굽받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라 말할 수 있다.

    [신라시대]

    신라의 주심포 포작은 삼국 중 제일 발전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데, 건물의 실례는 없지만 고증이 될 만한 자료는 몇 개를 들 수 있어 비교적 정확한 주심포양식을 알 수가 있다.


     

     간송미술관 소장 금동삼존불감(고려초기로 추정)


    즉, 불국사 다보탑에서 보는 주두와 소로의 형태를 비롯하여 안압지에서 출토된 목편의 공포부재와 신라사경(新羅寫經)에 나타나는 그림의 자료, 또 간송미술관 소장의 금동불감(金銅佛龕)에 나타나는 자료 등이 있는데, 이 중에서도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금동불감은 특히 세밀한 모형(模型)이 되어 있어 공포의 짜임을 잘 알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다만 엔타시스 있는 기둥 위에 짜여진 공포는 1출목을 가진 주심포계의 형식이라 단정짓기 어려운데, 기둥 위에만 공포를 짠 것이 아니고 기둥과 기둥 사이 창방 위의 중앙에도 공간포를 두고 있어 평방 없이 다포계양식을 가지는 과도적인 주심포양식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예는 중국 당대(唐代)의 변상도에도 나타난다. 여기에서 보면 주두와 소로에 굽받침 없이 짜여지고 첨차는 고구려벽화에서 보이는 것과 같이 교두형인데 그 끝이 상부에서는 수직으로 곧게 잘려 그 밑에서 비스듬히 잘려 있다.

    또, 신라사경에 나타나는 그림을 보면 불전(佛殿)이 그려져 있는데 엔타시스 있는 기둥 위에 창방을 걸고 기둥 위에는 주심포를 짜고 있고, 주두와 소로에는 굽받침이 없이 그 굽에 안으로 휜 곡(曲)을 나타내고 있으며 첨차는 앞에서 말한 대로 교두형이며 출목이 있고 공간포가 있는 과도적인 주심포계양식이다.

    [고려시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주심포의 예는 현존하는 실례가 많이 있어 그 특징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고려시대의 주심포계양식의 예로는 봉정사극락전(鳳停寺極樂殿, 국보 제15호)·부석사무량수전(浮石寺無量壽殿, 국보 제18호)·수덕사대웅전(修德寺大雄殿, 국보 제49호)·강릉객사문 (江陵客舍門, 국보 제51호) 등이 있다.


     

     

     내부 가구모습

     

     

     

     봉정사 극락전


    봉정사극락전은 1971년 해체조사시에 나온 묵서(墨書)에 의하여 그 중수연대가 1363년(至正 23)으로 밝혀져, 현재 남아 있는 고려시대의 건물로서 가장 오래된 유작품(遺作品)이라 할 수 있다. 그 특징은 다음과 같다.

    ① 맞배지붕이며,

    ② 엔타시스가 있는 기둥 위에 창방을 걸어 기둥 위에만 공포를 짰다.

    ③ 주두와 소로에 굽받침이 없고 굽이 약간의 곡을 나타내고 있다.

    ④ 첨차는 교두형이 아니고 그 끝이 수직으로 곧게 잘려 밑은 쌍S자형조각을 하고 있다.
    ⑤ 살미에 쇠서〔牛舌〕 등이 없다.

    ⑥ 행공첨차 없이 단장여로 출목도리를 받들고 있다.

    ⑦ 타봉형(駝峰形 : 낙타등모양)의 조각을 주심포와 주심포 사이에 두고 있다.

    ⑧ 종마루도리를 받들고 있는 대공 등에는 ‘人’자형 대공을 받들고 있는데 이것을 종도리 밑에서는 직선으로, 그 밑에서부터 처마도리까지는 약간의 곡을 두면서 내려오고 있다.

    ⑨ 종도리대공은 이미 포대공의 구조를 나타내어 타봉형과 첨차의 부재를 같이 사용하고 있다.

    ⑩ 내부반자가 없다.

    이상의 구조특징은 중국 당대(唐代)의 유구로 알려진 남선사대전(南禪寺大殿)의 예와 비슷한데, 단 첨차의 쌍S자형조각이 교두형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이 다르다.

     


     기둥위에 굽이 있는 주두가 확연하다

     

     

     

     무량수전 귀공포- 주두와 익공이 보인다

     

     무량수전 공포 초익공의 주심포

     

     무량수전  주심포

     

     무량수전 전면

     

     

     

     

    무량수전 모형도

     

     무량수전 내부 가구


    이상의 예를 기초로 다른 주심포양식의 건물과 비교하여 보면, 부석사무량수전에서는 지붕이 팔작으로 되어 있고 주두와 소로에 굽받침을 두고 있다. 또 행공첨차를 가지고 있으며 살미에 쇠서가 조각되기 시작하고 첨차 양단이 비스듬히 잘려 쌍S자형을 이루고 있으며, 타봉형대공이 간소화된 형을 하고 목구조가 봉정사극락전보다 복잡하게 되었다.

     수덕사 대웅전 모형

     

    대웅전 전경

     

     대웅전 측면

     

      대웅전 현판

     

     대웅전 뒷면의 공포와 외목도리

     

     대웅전 주심포와 익공

     

     대웅전 우미량과 측면 공포

     

     

    다음, 수덕사대웅전은 역시 맞배지붕으로 처리하고 있으며, 주두와 소로에서는 굽받침을 두고 있어 부석사무량수전과 같으나 주두 위의 두공(頭工)이 봉정사극락전과 부석사무량수전에서는 十자형으로 짜여지는 대신, 여기서는 살미가 내부에서 초가지〔草花枝〕모양을 하여 양봉(樑奉 : 기둥머리나 주두에 끼워 보의 짜임새를 보강하는 짧은 부재)을 이루고 있음과 밑단에서는 이른바 헛첨차를 이루고 있음이 특징이고, 또 그 상단부터는 쇠서를 이루고 있다.

    이 건물의 구조는 측면으로 보아 우미량(牛眉樑 : 도리와 도리 사이에 놓이는 휘어진 들보)을 중첩하여 가설하고 있는데, 이 우미량 끝을 받치고 있는 조립부재가 아름답게 조각되어 다른 건물에서는 볼 수 없는 가구의 아름다움을 나타내고 있다.

     

     

     

     

     

     

    강릉객사문도 맞배집에 헛첨차가 있고 주두와 소로에 굽받침을 두고 있는 점은 수덕사대웅전과 같다고 볼 수 있으나, 두공살미 내부의 대량 밑에는 양봉의 형식이 초가지로 되어 있지 않고 첨차형식을 취하고 있어 소로를 올려놓고 그 위의 보를 받치고 있다.

    또, 보의 끝은 중심에서부터 수장폭(修裝幅)으로 좁아져서 보통 포의 살미와 같이 삐죽이 나와 그 끝에서 쇠서가 조각되고 있다. 여기서는 ‘人’자 대공을 쓰지 않고 포대공과 판대공을 쓰고 있음이 특이하나 이는 문의 구조이기 때문에 생략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상의 고려시대 주심포의 주요 실례를 들어 비교 검토한 결과 다음과 같은 특징을 종합할 수 있다.

    ① 기둥에 엔타시스를 뚜렷이 가지고 있다.

    ② 기둥 윗부분에, 기둥과 기둥 사이에 창방만을 걸고 있으며 평방이 없다.

    ③ 공포는 기둥 위에서만 짜이고 공간포를 짜고 있지 않다.

    ④ 주두나 소로는 굽에 곡이 있고 굽받침이 있는 경우도 있으며 없는 경우도 있다.

    ⑤ 첨차는 교두형이 아니고 쌍S자형을 취하고 있다.
    ⑥ 살미에 쇠서모양의 조각이 없는 것도 있지만 있더라도 원초적인 형태로 소박한 특징이 있다.

    ⑦ 주두(柱枓 : 대접받침) 밑에는 헛첨차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있는데, 헛첨차가 있는 경우는 주두 위에 놓인 두공이 첨차의 모양과 규격이 같은 十자형으로 짜여지지 않고 첨차와 내외로 뻗은 살미의 부재규격이 서로 다른 두공을 짜고 있다.
    ⑧ 보의 단면이 항아리의 입면도와 같이 곡을 이루고 보의 뺄목이 주심(柱心)에서부터 수장폭으로 좁아져서 끝에서는 살미의 쇠서 모양으로 변하여 간다.

    ⑨ 대공은 포대공과 ‘人’자대공을 겸하여 사용함이 보통이다. 내부반자를 꾸미지 않고 연등천장을 하고 있어 내부에서 우아하고 아름다운 가구를 그대로 볼 수 있게 노출시키고 있다.

    ⑩ 가구가 소박하고 복잡하지 않으며 비교적 소규모의 건물을 꾸미고 있다.

    [조선시대]

    조선시대에도 고려시대양식을 계승하여 주심포계양식을 계속 사용해 오면서 한편으로 고려 때 발전되어 온 다포계양식을 더 많이 써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주심포계의 건물은 그 규모가 더욱 작아지고, 주가 되는 건물은 대부분 다포계양식을 사용하고 있다.

    조선시대 주심포계양식의 주요건물의 실례로는 부석사조사당(浮石寺祖師堂)·무위사극락전(無爲寺極樂殿)·도갑사해탈문(道岬寺解脫門)·관룡사약사전(觀龍寺藥師殿)·송광사국사전(松廣寺國師殿)·송광사하사당(松廣寺下舍堂)·개목사원통전(開目寺圓通殿)·봉정사화엄강당(鳳停寺華嚴講堂)·고산사대웅전(高山寺大雄殿) 등을 들 수 있다.


    부석사 조사전 전경

     

    조사전의 선비화

     

    조사전 측면 가구 

     

     내부 가구

     

     내부 가구 모습으로 마루대공이 판대공이다

     

     이들의 특징은, 부석사조사당은

    ① 맞배집이며 기둥에 엔타시스가 약화되었고,

    ② 헛첨차가 있고,

    ③ 주두와 소로의 굽에 곡이 없이 곧게 잘려 있고,

    ④ 첨차가 교두형으로 되어 있어 특이하고 행공첨차가 없이 꾸며졌으며,

    ⑤ 대공은 포대공이며 ‘人’자대공도 있고,

    ⑥ 보의 단면도 사각형에서 밑의 모서리를 굴려 곡을 두고 있을 뿐이고,

    ⑦ 내부는 반자가 없는 연등천장이다.


     

     

     

     

     

     

     

     

     

     

     

     

     

     

     

    또, 무위사극락전에서는 역시 맞배집에 엔타시스가 줄어든 구조로 주두와 소로의 굽에도 곡을 이루지 않고 있으며 살미에 초방머리가 뾰족한 쇠서로 변하고 양봉과 대공도 파련대공(波蓮臺工)으로 변하고 있다.

     

     

     

     

     

     

     도갑사해탈문은 맞배집에 엔타시스가 약간 있고 헛첨차를 두고 있으며, 양봉이 안초공형태의 초가지로 되어 있고 우미량을 걸친 것이 특징이며 포대공과 ‘人’자대공도 두고 있다.

     

    창녕 관룡사 약사전 전경

     

     

    약사전 측면 가구 

     

     관룡사 측면 외목도리, 우미량이 보인다

     

     

    관룡사약사전도 맞배집으로 엔타시스가 있는 기둥에 헛첨차를 두고 우미량과 같이 곡을 가진 보를 걸쳐 얹고 있으며 정면과 측면 모두 단칸인 작은 규모의 건물이다.

    송광사 국사전과 하사당, 개목사원통전·봉정사화엄강당 등은 모두 맞배집에 엔타시스가 약화된 기둥과 이른바 익공계의 익공과 같이 뾰족하게 뻗은 쇠서를 보이고 있어 익공계양식으로 변화되어 가는 경향을 나타내고 있으며, 보의 단면 등은 다포계건물에서 볼 수 있는 곡이 없이 사각형에 모만 죽인 단면을 보이고 있다.

     

     

     

     

     

     

     

     

     

     

     

     

     

     

     

     또, 고산사대웅전의 경우에는 지붕이 팔작으로 되었고 엔타시스가 거의 없는 기둥 위에 창방과 평방을 올려놓고 그 위에 주두와 공포를 짰는데, 첨차는 교두형이 아닌 쌍S자형의 첨차를 하고 주두와 소로는 굽에 곡을 두고 있지 않으면서 일부 굽받침을 두고 있음이 특기할 사항이며, 특히 건물 내부에 충량 등이 있어 다포계양식의 중요한 특징을 많이 내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 나라 주심포계양식은 고대 삼국시대부터 발전해 오다가 고려시대에 와서 그 틀을 잡게 되고 조선시대에까지 많이 사용하게 되었다. 초기에는 기둥에 엔타시스가 강하게 나타나 있고 지붕은 맞배집이 많으며 평방 없이 창방을 짜고 공포를 기둥 위에서만 짜서 공간포가 없이 가구되나 경우에 따라 공간의 장식으로서 ‘人’자나 동자주를 두는 예가 있다.

    대량은 그 단면이 항아리의 입면과 같이 아름답게 꾸며지고 첨차는 교두형으로 이루어지고 주두나 소로의 굽에는 안으로 휘는 곡을 두고 있고 굽받침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있다. 또 대공에는 포대공을 ‘人’자대공과 같이 사용하고 있고 내부가구와 부재의 조각이 아름다워 내부에 반자도 없이 연등천장을 하여 가구를 노출시키고 있다.

    성숙기에 들어서서는 첨차의 끝에 쌍S자형의 조각이 생기기 시작하여 대공과 양봉 등에 초가지의 파련화(波蓮花)가 나타나기 시작하고, 살미에 쇠서문양을 이루기 시작하며, 또 지붕도 일부 팔작지붕이 생기게 되어 건물의 내외가 점점 장식화되기 시작한다. 또한 건물의 규모도 자유롭게 형성된다.

    퇴화기에 들어서서는 다포계양식의 건물에 압도되어 주심포계양식의 건물도 일부 다포계양식 및 익공계양식의 특징과 공통점이 많아진다. 그리하여 기둥에 엔타시스가 약화되고 보의 단면과 포작에 주두와 소로의 굽에는 곡을 두지 않고 쇠서가 날카롭게 뻗어나와 있어 내부 목조가구도 다포계에서 보는 충량 등을 사용하는가 하면 창방 위에 평방을 올려놓아 그 위에 주두를 얹고 포작을 짜기도 한다.

    한편 익공계와도 구별할 수 없는 주심포작의 건물도 많이 생기게 되며, 특히 이 쇠퇴기의 주심포계양식의 건물은 규모도 작아지게 된다.

    ≪참고문헌≫

    韓國建築樣式論(鄭仁國, 一志社, 1974), 韓國木造建築(金正基, 一志社, 1980).

     

     

    익공집

     

    익공 -  기둥 위에 새날개처럼 뻗어나온 첨차식(墅遮式) 장식으로 장식적인 효과가 있는 전통건축양식.

    주두(柱頭)와 소루(小累)의 굽은 사면으로 만들어지며 평방(平枋)과 주간포작(柱間包作)이 없으므로 간단한 주심포집에 가까운 외형을 갖추었으나 출목(出目)이 없는 것이 보통이고 대규모의 건축에는 외부에 l출목을 두는 경우도 있다.


    익공집의 근원은 고려시대로 추측되나 건축수법과 외형은 조선 초기에 체계화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대규모 중요 건축은 다포집 양식이었고, 2차적으로 중요한 건축은 주심포집 양식을 사용한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그 이외에 부차적인 건축에는 전반적으로 익공집 양식이 사용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익공집 양식의 주요 건물로는 해인사 장경판고(海印寺藏經版庫)(1488), 서울 동묘(東廟)(1602), 수원 화서문(華西門) 등이 있다.

     

    초익공과 2익공

     

     익공(翼工)

             


    익공의 형식. 목조건축양식인 공포의 1익공 형식. 서울 종묘 영녕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진
    초익공 양식

     

     

    2익공의 형식. 목조건축양식인 공포의 2익공 형식. 강릉 오죽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진

     이익공 양식


    목조건축양식인 공포(栱包)의 일종. 공포의 구조형식인 주심포(柱心包)·다포(多包)·익공 (翼工)계의 세 가지 형식 중 구조적으로 가장 간결하게 꾸며진 형식이다.

    이 형식에는 기둥 상부 주두(柱枓) 밑에 돌출한 익공재를 놓고 그 위에서 직접 보〔梁〕의 머리가 얹히도록 한 1익공 형식과, 익공재 2개를 두어 그 위에 보가 얹히도록 한 2익공 형식이 있다. 2익공 형식에는 주심(柱心) 외부에 출목 하나를 두어 외목도리(外目道里)를 받치는 1출목 2익공과 출목을 두지 않는 무출목 2익공 형식이 있다.

    익공형식이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 확실하지 않으나 익공이라는 용어는 1796년(정조 20) 집필된 ≪화성성역의궤 華城城役儀軌≫에 쓰여 있으며, 그 이전에도 영조 때 기록된 ≪종묘개수도감의궤 宗廟改修都監儀軌≫에 ‘입공(立工)’이라 한 것이 있는데 이것은 익공형식을 표현한 듯하다.

    문헌에는 구조적인 설명이 없지만 일부 표현된 그림이나 실제 세워진 건물로 보아 다음과 같은 특징을 나타낸다. 첫째, 기둥 상부에서 창방과 같이 十자로 짜여지나 창방 윗면의 높이보다 익공재 높이를 더 높여 여기에 주두가 안치되게 주두자리를 파고 주두를 얹었으므로, 익공재의 위치로 보아 결국 헛첨차와 같은 형식을 나타낸다.

    둘째, 익공재 위에 보머리를 직접 닿게 얹되 주두 상부가 보 밑에 묻히도록 조립하고, 보머리는 보의 폭 그대로 주심 밖으로 빠져 삼분두(三分頭) 또는 운형(雲形)으로 끝마무리를 한다. 셋째, 2익공일 때에는 재주두(再柱頭)라는 특수한 크기의 주두를 사용한다. 넷째, 익공재의 건물 내부 쪽은 반드시 보를 받치는 보아지[樑奉]을 형성하고 있다.

    이와 같은 특성을 보이는 형식을 전형적인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주심포계 형식과 익공계 형식의 한계를 정하기는 어려움이 있어 학자들간에 이견이 있을 수 있다. 실제 익공계를 사용하였던 가장 오래된 유구는 강릉 오죽헌(烏竹軒, 1536)과 해운정(海雲亭, 1530) 등 조선 초기의 것으로서, 오죽헌은 2익공 형식이고 해운정은 1익공 형식이다.

     

     


     

     오죽헌의 이익공


    오죽헌은 기둥 윗부분에 창방을 양측에 걸어 이 창방과 같은 높이에서 직각으로 제1익공 쇠서를 돌출시키고, 이 위에 주두를 놓되 익공 윗면을 약간 파고 물리게 하여 여기서 첨차와 제2익공을 十자로 짜놓았다. 제2익공 위에는 재주두를 놓고 그 위에서 보와 장여 등을 맞추었는데, 보머리는 주심에서 원래의 폭대로 빠져 그 끝이 직각으로 절단되었다.

    익공쇠서에는 화두자(華頭子)가 잘 나타나고, 1익공에는 상하면에 굴곡이 있는 조각을 두어 주심포계의 것과 비슷한 점이 있다. 익공의 내부는 보 밑에서 보를 받는 보아지를 형성하고, 첨차 일부는 교두형(翹頭形 : 활이나 원호 모양으로 깎아낸 모양)으로 하고 일부는 당초나 초화지(草花枝) 문양을 나타내며, 주간(柱間)에는 화반을 놓았다.

     

     

     해운정의 초익공


    해운정은 네모기둥 위에 초익공을 짜 주두를 놓고 그 위에 보머리를 얹었다. 여기서도 익공 내부는 당초문의 양봉(樑奉)을 만들고, 익공쇠서는 상하면에 굴곡 있는 조각을 두었다.

    특히, 귀포에서는 도리와 장여 뺄목 밑에 소로를 받치고 있어 익공계의 구조에서 흔하지 않은 특징을 보이기도 한다. 또 주간의 창방과 도리 사이에 청판을 막고 판소로〔板小累〕를 배열하고 있으며, 화반(花盤)은 두지 않았다.

     

     

     봉정사 화엄강당의 초익공


    경상북도 안동에 있는 봉정사화엄강당(鳳停寺華嚴講堂, 보물 제448호)의 예를 들면, 그 짜이는 수법이 2익공의 형식을 따라 주두 밑에서 제1익공형을 놓았고, 또 주두 위에서 제2익공형을 놓았다.

    외부로는 제2익공에서 직교되는 출목첨차(出目檐遮)를 두어 외목장여와 도리를 받치고 있으며, 밖으로 뻗어나온 익공쇠서의 부리는 길고 뾰족하게 뻗어 익공계의 전형적인 모양을 이룬다.

    이들은 내부에서는 상하 맞닿아 부재가 당초문의 양봉을 만들고, 외부에서는 부재가 서로 떨어져 첨차 밑에 소로를 끼워 받치며, 보의 뺄목이 주심에서부터 밖으로 수장재의 폭처럼 좁아져 쇠서 모양의 끝을 내밀고 있다. 그러므로 이 건물형식은 주심포의 성격을 띠고 있다.

     

     개목사 원통전의 이익공


    이렇게 주심포계의 형식을 취하면서 익공으로 발전되는 양식이 많이 있는데, 예를 들어 안동 개목사원통전(開目寺圓通殿, 보물 제242호)의 정면포작을 비롯하여 전라남도 송광사하사당(松廣寺下舍堂, 보물 제263호), 강원도 청평사회전문(淸平寺回轉門, 보물 제164호) 등은 과도기적인 형식으로 주심포계로 분류되는 경우가 많다.

    전술한 ≪화성성역의궤≫나 ≪궁궐영건의궤 宮闕營建儀軌≫를 통해서 표현되는 익공의 구조형식을 전형적인 형식이라 말할 수 있는데, 이들의 실례는 경복궁·창덕궁·창경궁·덕수궁 등 궁궐 안의 누정(樓亭)이나 행각(行閣) 및 부속가와, 종묘(宗廟)의 정전(正殿)과 영녕전(永寧殿), 능의 정자각(丁字閣) 등 사묘건물을 들 수 있다.

     

     

     종묘정전의 이익공


    이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종묘정전과 경복궁의 경회루(慶會樓)이다. 정전은 2익공 형식인데 기둥 상부에서 창방과 제1익공재를 직교되게 가설하고, 익공재 윗면을 파서 주두가 물리도록 올려놓고 그 위에 제2익공재를 올려놓되 외부로 출목을 두어 첨차를 소로로 받치게 하였으며, 이 윗면에서는 재주두와 퇴보를 얹고 이 퇴보머리에서 외목도리를 받치도록 되었다.

    익공쇠서의 끝은 뾰족하여 마치 새부리 모양을 하고 그 윗면은 거의 수평을 이루도록 다듬었다. 또 건물 내부에서는 쌍S자형이 변형된 화두자를 가지는 당초문의 양봉을 꾸미고, 외목도리 밑에는 위에서부터 장여와 첨차가 놓이고 그 밑에 소로를 2개의 익공쇠서 사이에 끼워 받치게 하였다. 퇴보머리는 삼분두를 조각하여 제2익공재 상면에 내려앉혔다.

     

     

    경회루는 2익공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출목이나 첨차 없이 제1익공은 주두 밑에 짜고, 제2익공은 재주두 밑에 짜고, 제2익공 위에서 보를 얹고 그 위에 처마도리를 받치도록 하였다.

    이와 같이 간편한 공포구조로서 거대한 건물도 능히 결구(結構)할 수 있는 익공형식은, 조선시대의 배불숭유사상으로 지나치게 화려하고 경비를 많이 들이는 것을 삼가는 경향과도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며, 한편 전부터 주심포계의 공포구조형식이 간결하게 변형되다가 결국 익공계 구조형식을 따르게 되는 두 가지의 발생단계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전술한 궁궐건물 외에도 성곽건물과 서원·향교건물, 사찰의 부속건물에 익공형식이 많이 쓰였음을 볼 수 있다.

    이상 익공계의 전형적 특징을 종합한다면 다음과 같다.

    ① 조선시대부터 사용된 간단한 공포구조형식의 건물로 가구가 간단하다. ② 보통 궁궐·사찰 등의 부속건물과 사묘·누정 등의 건축에 많이 사용된 형식이다. ③ 기둥은 배흘림이 거의 없는 각주 (角柱)와 원주 다같이 사용되며, 기둥 윗부분에서 창방과 직교되게 짜여진다.

    ④ 보통 1익공과 2익공 형식이 있고, 2익공 형식일 때 출목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있으며, 2익공은 주간에 화반을 두는 경우가 많다. ⑤ 익공쇠서는 보통 상면이 수평으로 가공되어 끝이 뾰족하고 건물 내부 쪽으로는 보 밑에 양봉을 이루고 있다. ⑥ 보의 뺄목은 보의 폭 그대로 돌출하여 삼분두 또는 직절되어 계자눈을 돌리는 경우가 많다.

    이와 같은 전형적인 것 외에도 익공형식은 부분적으로 변형된 형식이 많아 시대와 기능에 따라 발전되었다.

    ≪참고문헌≫

    華城城役儀軌, 宗廟改修都監儀軌, 昌慶宮營建都監儀軌, 韓國建築樣式論(鄭寅國, 一志社, 1974), 韓國建築史(尹張燮, 東明社, 1980), 韓國木造建築(金正基, 一志社, 1980

     

    초익공

     

    2익공

     

    초익공

     

    이익공

     

     

     

    주심포

     

     

    다포

     

     

     하앙 구조

     

     

    .

    익공계의 구조

     

    기둥 위의 밖으로는 쇠서의 형태로, 그리고 안으로는 보아지의 역할을 하는 하나의 부재를 기둥머리에 맞물리게 끼우고 그 위에 주두 두공과 쇠서를 짜서 공포를 꾸미는 형식이다. 따라서 외관상으로는 주심포 형식과 유사하게 보이나 주심포에서 보이는 헛첨차의 위치에 놓이는 쇠서 보아지가 하나의 판의 형태로 기둥과 주두를 함께 감싸고 있어 그 위로 주두 위에 놓이는 쇠서의 하단부와 서로 맞닿게 되는 형태를 가진다. 익공은 놓여지는 쇠서의 수에 따라 초익공과 이익공으로 대별되며 이익공은 그 상단에 주두와 같은 형태의 납작한 재주두를 놓아 대둘보 머리를 받치기도 한다. 익공 형식은 외관이 다포계의 건물처럼 화려하지 않으나 부재의 양이 훨씬 줄어들며 또한, 치목과 결구의 합리적인 방법 때문에 사찰의 부속건물이나 궁궐의 편전과 침전, 문루, 그리고 향고나 서원, 상류주택 등 조선시대의 각종 건물에 폭넓게 사용되었다.

     

    조선초기에 주심포 양식을 간략화 한것으로 기둥위에 새 날개처럼 첨차식 장식을 장식효과와 주심도리를 높이는 양식이다.

    - 특징 : 장식 부재가 하나인 초익공 또는 익공과 부재를 두개 장식한 이익공이 있어 관아, 항묘, 서원, 지방의 상류 주택 에 많이 사용되었다.

    - 건축물 : - 조선 초기 : 옥산서원 독락당(1532,초익공), 강릉 오죽헌(이익공)

                    - 조선 중기 : 서울 동묘(초익공), 서울 문묘 명륜당(1606, 이익공)

                    - 조선 후기 : 경복궁 향원정, 수원 화서문 (1796)


     

     

                                            부용정(이익공)

     

                                       강릉향교대성전(초익공)

     

     

     

     공포와 출목

    공포(栱包,工包,貢包)는 간단히 포包라고도 하며 기둥위에 놓여서 지붕의 하중을 원활하게

    기둥에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공포 위에는 보와 도리 및 장혀가 올라가는데 이들을 타고 내려온 지붕의 하중이 합리적으로

    기둥에 전달되도록 한다.

     

    공포라는 명칭은 동양삼국에서 모두 다르다.

    한국에서는 '공포'라고 하지만, 중국에서는 '두공斗拱'이라고 하고, 일본에서는 '쿠미모노組物'

    라고 한다.

      

    중국의 두공이라는 명칭은 주두와 첨차가 합쳐진 명칭이다.

    즉 공포를 구성하는 가장 대표적인 부재의 명칭에서 유래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의 공포라는 명칭은 첨차가 어떻게 짜여지느냐 하는 구조법에서 공포라는 명칭이

    발생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더욱 명쾌하게 줄여서 포包라고도 한다.

    그 조합방식에 중점을 두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일본의 쿠미모노組物라는 것도 같다고 할 수 있다.

     

    즉 공포라는 것은 기둥위에서 주두와 소로 ,첨차,살미 등의 공포 부재들이 어떻게 조합되었느냐

    하는 것이다.

     

    기존의 공포 분류방식은 다포, 주심포,익공으로 크게 구분하고 있다.

    이 분류방식은 포의 배치방식에 따른 분류로 포 자체의 형식에 따른 분류방식이 아니다.

     

    조선시대 건축관련 문헌이나 중국 및 일본에서와 같이 포 자체의 형식에 따라 포작계와 비포작계

    로 구분하였으며, 익공과 행공 등의 공포부재 명칭도 기존 명칭과 다른 개념으로 정의하였으므로

    유의하기 바란다(한국건축용어,김왕직)

           

    공포의 요약

    1.       위치 : 기둥과 지붕 가구 사이

    2.       구성부재 : 주두(柱頭), 소로(小累), 첨차, 살미 등

    3.       구조적 기능

             - 지붕의 하중을 도리, 보 등을 통해 전달받아 기둥에 전달

              - 처마 길이의 신장(伸長)

    4.       의장적 기능

     -        지붕이 건물의 몸체를 무겁게 짓누르는 듯한 압박감 감소

     -        입면상 중요한 시각적인 비중을 점유

     -       건물의 형식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

     

    포작계(包作系) 공포

    포작계 공포는 출목이 있는 공포형식을 말하는 것으로 포집이라고도 한다

     

    출목

    작은 건물일 경우에는 기둥열상에만 도리를 놓고 서까래를 걸어도 처지지 않지만 많이 빠져나온 큰 건물의 경우에는 도리를 가능하면 기둥열 밖으로 빼야 서까래가 안정되게 걸린다. 이것을 출목이라고 한다.

       출목은 기둥열을 중심으로 건물 안과 밖으로 모두 빠져나오는데 안으로 빠져나온 출목을 내출목(內出木), 밖으로 빠져나온 출목을 외출목(外出木)이라고 한다.

       또 이 출목은 한 개만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서 여러 개가 빠져나올 수 도 있다. 이때는 각각 번호를 붙여서 기둥 열에 가까운 것부터 내1출목, 내2출목, 내3출목..., 외1출목, 외2출목,외3출목... 등으로 분류한다.

       통상적으로 출목의 숫자는 외출목 수보다 내출목의 수가 1개 더 많다.
    따라서 포작계 공포의 종류는 출목의 숫자에 따라 세분하여
    '몇 포집'이라고 한다.

       가장 간단한 것은 1출목인데, 1출목일 경우에는 3포집이다. 포의 숫자는 첨차의 숫자를 가지고 헤아리는데 1출목은 통상 첨차가 3개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때에 따라서는 출목수와 첨차의 개수가 일정치 않은 경우가 있으므로 통상적으로는 [출목수 X 2+1+=포수]로 한다. 예로 1출목인 경우에는 1 x 2 + 1 = 3이므로 3포집이 되고, 2출목인 경우에는 2 x 2 + 1 = 5이므로 5포집이 되는 것이다.



                              

                                  출목(외7포, 내9포)

     

     

    포작계 공포의 종류는 출목수에 따라 3포. 7포. 9포... 등으로 분류한다. 그러나 대개는 출목이 내외로 있으며 내출목 수가 외출몰에 비해 1개가 더 많은 것이 보통이므로 외3포내5포, 외5포내7포, 외7포내9포...등으로 분류한다.

       포작계 공포의 종류는 이렇게 포수에 따라 분류되지만 포의 배치방식에 따라 주심포 형식과 다포형식으로 나누며 또 포부재의 모양에 따라 출목익공형식과 하앙식으로도 분류할 수 있다. 이것은 포의 배치와 모양에 따라 자의적으로 명칭을 붙인 것이다.


                      

     

     


     

                        


      초익공집 기둥상부의 부재결구

     

     기둥머리의 사괘

     기둥세우기

    여기서는 익공부터 조립

     

     창방조립

     

     익공, 창방이 결구된 모습

     

     귀기둥의 경우에는 익공보아지가  없고 창방의 뺄목을 초각해서 익공처럼 보이게 한다.

    주두치목

     주두놓기

     

     

     소로를 창방위에 놓고

     소로착고 끼우고

     주두에도 소로착고끼우고

     장여조립 대기중

     장여를 주두위에 끼우고

     

     

     장여조립완료

     귀기둥의 장여 조립

     

     조립 대기중인 대들보

    대들보의 숭어턱

     

     대들보 조립

     

     대기중인 도리

     왕찌도리

     도리를 대들보의 숭어턱에 조립

     

     나비장으로 두개의 도리를 이음

     

    왕찌도리

     

     

     

     

     

     

    가구 [架構]에 대하여..... |

     

    가구(架構)-

       :기둥위나 공포에 얹혀 내부공간을 형선한 여러 부재를 총칭,,,

    *보와 도리, 대공이 기본 부재이다.

    *의장재 - 아름다운의 효과를 얻으려 한다.       (연등천장)

    *가구재 - 천정을 설치하여 가구재를 은폐시켜 단순의 가구재만...(우물천장)

    -보-

    *대들보 : 목조 건축의 기본 구조재.. 보통 평기둥과 뒤의 평기둥에 결구된다.

                   큰건물은 평기둥과 고주에 걸치게 된다..

            *고려시대 - 항아리형의 단면 (역학적 기능과, 의장적 효과)

            *고려, 조선초 - 공포와  대들보와의 결구는 ‘수장폭’의 크기로 결정 -구고현법

                                  *대들보의 육중한 크기를 가볍게 보이도록 노력한 결과

            *조선중기(이후) - 보의 단면은 차차 장방형 으로 무겁게 느껴진다.
                             (의장재의 기능 보다는 , 구조재로서의 기능에 충실하려단 결과)

            *옛날형식의 보 : 홍예형보가 많은데 중앙부분이 축 처져 보이는 ‘시각의 착시현상교정’

     *종보 (마루보) : 대개 대들보 길이의 1/2이며,

                             대들보로부터의 높이는 대들보부터 마루도리까지의 높이 1/2에 해당한다.

    *퇴량(退樑) ; 보보다 낮게 걸리고, 고주가 있어 툇간이 달릴때 사용되는 보이다.

                    1) 퇴량이 평기둥 머리에 얹혀 수평으로 고주의 몸에 끼는 방식...(수장폭보다 굵게)

                    2)고주 머리에서 평기둥 위의 공포와 결구되는 방법, (수장폭과 같은 크리의 부재사용)

    *충량(衝樑) ; 측면의 평기둥을 보강하며. 측면을 통과하는 중도리를 받아....

                        지붕과 박공부분의 하중 을 지탱하여 기둥과 보를 연결시켜주는 역할.

    *우미량(牛尾樑) : 고려시대와 조선초기의 맞배집에서 찾아볼수 있다.

                              도리와 도리사이를 연결시켜준다.  예) 예산의 수덕사 대웅전...

                            *내부공간에 수평과 수리의 부재로 정적인 구성을 했을 때....

                              우미량의 곡재는 동적인 요소를 첨가해준다.

    *귓보 ? : 중층 이상의 건물. (탑형식)  .

    *맞보? : 고주나 받침기둥이 따로있어 두개의 보가 맞닫게 된다.

               (건물 평면이 크거나, 증층의 협소한 평면에 툇보가 생략될 경우 쓴다)  

    도리

    ; 제형 도치형과 납도리.

    *외목도리, 내목도리(다포), 주심도리 : 보통 보와 퇴량위에 얹히나 고대일수록

                                                             훨씬상에에 얹혀 ‘(서까래)을 받는다.

    *중도리, 하중도리, 상중도리. 종도리(상량도리)

    *굴리기 - 도리의 둥근 부분에 맞춰 장혀를깎는다.  

    *평깎기 - 장혀에 맞춰 도리가 닫는 맡을깎는다, 

     


    대공

    : 대들보, 중보, 종보에 얹혀 종도리를 받는 부재. (동자대공, 접시대공, 화반대공, 포대공,

                                                                             포대공, 판 대공, ㅅ형대공)

    * 동자대공- 가장 간단하고 시공이 편리하다.(반자가 있을 경우 많이 쓴다.)

    * 접시대공- 층층이 쌓아올려 접시를 놓고 도리를 받는다.

                    보방향으로만 층등이 쌓아올려,,,,

                  보와 도리방향의 +로 쌓아올려....  (접시받침)

    *화반대공 - 복화반 (봉정사 극락전, 송광사 하사당)

                   고려말 조선초-파연대공

                        조선 중기 이후 - 앙화형 조각품의 대공이 많다.

     * 포대공 - 대공을 공포처럼 짜아 놓은 대공.......

     *포대공+화반대공을 복합적의로...

     *포대공의 세부 수법이 보여주는 시대성이-‘건축양식 판별에 핵심’

                                                                     포처럼, (화반+포대공)

    *판대공 - 토막을 중첩시켜서 사다리꼴 모양...

    *ㅅ 형 대공(솟을합장) : 고구려 벽화에 남아있다.

                       내반된 것 ; 고대건물(솟을 합장내)

                       외반된 것 ; 개심사 대웅전

               *봉정사 극락전 : 도리사이에도 합장재 사용.

                                        수덕사 대웅전의 도리사이에 있는 ‘우미량’

    *장혀

    : 도리를 받는 부재이다.

     -통장혀 : 다포계 건물

     -단장혀 : 고려와 조선초 주심포계 건물에서 사용.

      -뜬장혀 : 도리에 직접 부착되지 않고, 통, 단장혀 아래쪽에 떠있는 상태로

                    부재간을 연결시켜주는 구조재.(도리밑에 장혀가 있고 거기에 소로를 놓고

                                                                   밑에 다시 장혀가 있다-상도리 밑)

      - 초공 :  도리를 받는 장혀에 짜여, 도리와 장혀가 좌우로 구르지 못하게 한 부재..

                   ( 초각모양, 첨차형, 새머리형태)..

     


     

     

     

    (부석사 안양루 화반, )


     

     

     

     


     

    출처 : 요아킴
    글쓴이 : 김일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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