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스크랩] 韓屋(잡상,기와,담장,철물,주춧돌)| (옮긴글)

챨리박 2011. 2. 28. 15:44

잡 상(雜像)

잡상은 궁궐의 추녀나 용마루 또는 박공머리의 수키와 위에 덧얹는 흙이나 오지로 구은 기와이다.  이들은 모두 10 개로,  중국 명나라의 장편 신괴(神怪) 소설인 「 서유기 」에 등장하는 인물과 토신(土神)을 형상화한 것이다.

대당(大唐) 황제의 칙명으로 불전을 구하러 인도에 가는 현장삼장인 대당사부(大唐師傅),  손오공으로 알려진 손행자(孫行者),  저팔계(猪八戒),  사화상(沙和尙),  마화상(麻和尙),  삼살보살(三煞菩薩),  이구룡(二口龍),  천산갑(穿山甲),  이귀박(二鬼朴),  나토두(羅土頭) 등이 그들로,  혹은 앉거나 혹은 엎드리거나 혹은 뒤로 젖혀 앉아서 집안으로 들어오는 잡귀를 막는 구실을 한다.

소설「 서유기 」에서 이들은 힘을 합하여 요괴의 방해를 비롯한 기상천외의 고난을 수없이 당하면서도 하늘을 날고 물 속에 잠기는 갖가지 비술을 써서 이를 극복,  마침내 목적지에 이르고 그 보답으로 부처가 되었다.  이들 열 개의 형상을 지붕 위에 올려놓는 까닭은 바로 이에 있는 것이다.

이들이 지붕 위에 등장한 것은 요나라 때인 9 세기 말부터이며 명나라와 청나라에 이르러 널리 퍼졌다.  이들이 우리나라에 건너온 것은 고려시대일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중국에서는 이 잡상들을 궁궐뿐만 아니라 문루나 관아,  능의 제사청 그리고 사찰 등에도 올려 놓지만 우리네 절간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이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형상 자체가 더러 바뀐 점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곧, 선인상(仙人像)과 여러 가지 동물로 변화한 것이다.  맨 앞쪽의 말을 탄 선인상을 비롯하여 용,  봉,  사자,  기린,  천마,  해마,  물고기,  해치,  후, 원숭이 등 모두 11 가지이다.  이로써 중국에서 많은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우리 식으로 바꾸어서 소화한 옛 분네들의 슬기를 알 수 있다.

현재까지 남은 잡상들을 시대 순으로 늘어놓으면 숭례문(崇禮門 1448 년)에 9개,  창경궁 홍화문(弘化門, 17 세기)에 5 개,  창덕궁 돈화문(敦化門, 17 세기)에 7 개,  수원 팔달문(八達門, 1796 년)에 4 개,  창덕궁 인정전(仁政殿, 1804 년)에 9 개,  경복궁 경회루(慶會樓, 1867 년)에 11 개,  경복궁 동십자각(東十字閣, 1865 년)에 5 개,  덕수궁 중화전(中和殿, 1906 년)에 10 개이다.

이들 가운데 경회루 잡상 중 원숭이(손오공)상은 높이가 40 ㎝ 에 이르며,  나머지 상들은 28 ~ 32 ㎝ 쯤이다.  조선시대 문필가인 유몽인(1559 ~ 1623)이 쓴  '어우야담(於于野談)' 에는 새로 부임한 관리가 선임자에게 첫 인사를 차릴 때 대궐 지붕 위의 신상 이름을 단번에 차례대로 외워야 하였다는 내용이 보인다.   김광언  인하대 교수.민속학

 

 

1.잡상이란?

 목조 권위 건축의 추녀마루에 배열, 장식하는 짐승 형상을 잡상雜像이라 한다. 잡상은 보통 맨 앞 자리에 있는 선인仙人을 포함해서 십여 종류가 된다. 잡상은 저마다 조금씩 다른 모습을 하고 있으나, 각각의 이름을 정확히 알기 어렵다. 중국에서는 잡상을 일컬어 ‘선인주수仙人走獸’라 한다. 탈것 위에 올라앉은 기봉선인騎鳳仙人을 필두로 용, 봉황, 사자, 천마, 해마, 산예, 압어, 해치, 두우 순으로 배열된다. 우리 나라의 경우는 중국과 좀 다른데, 각각 대당사부·손행자·저팔계·사화상·마화상·삼살보살·이구룡·천산갑·이귀박·나토두 등으로 불린다

 

2.잡상의 설치시기 

잡상은 어느 시기 부터 사용되었을까? 고분벽화에도 잡상이 그려져 있는 건물상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삼국시대와 고려이전의 궁전건물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그 사용시기를 고려 이전으로 보기는 곤란하다.

  서울 숭례문의 잡상으로 보아 조선시대에 들어와 잡상이 설치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나 숭례문은 원래 팔작지붕이었던 것이 우진각지붕으로 바꿔졌기 때문에 창건당시부터  잡상이 설치되었던 것이었는지에 대하여는 분명하지 않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궁전건물은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고 그 후에 중건된 것이다. 목조건물은 화재를 가장 두려워하게 되었을 것이다.

  화재를 면하려면 화인(火因)을 없애는 한편 벽사적 내지는 주술적인 방편이 필요하였을 것이다.

  잡상의 설치 시기는 중국의 송대에 나타난 잡상의 영향을 받아 조선시대에 우리 나라에 들어와 임진왜란이후에 성행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와 잡상장에 대한 법전을 보면 조선경국대전 공전에 잡상장은 와서(瓦署)의 소속으로 4명을 두었으며 와장(瓦匠)은 40명으로 직종을 구분하였다.

 

3.잡상의 설치건물  

잡상은 어떤 건물에 설치되어 있는가? 잡상은 모든 기와지붕위에 설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궁전건물과 궁궐과 관련이 있는 건물에 한정된다.

  또한 궁전건물중에서도 양성으로 되어 있는 내림마루와 귀마루에만 배치되고 기와로 마감된 기와마루에는 배치하지 아니하였다.

  잡상이 설치되어 있는 건물로는 정전, 왕의 침전, 궁성의정문, 도성의 성문, 궁궐 안의 누정, 왕릉, 왕비릉, 원묘의 정자각, 종묘, 성균관, 동궐등으로 한정되며 민가, 사원, 서원, 지방향교에는 잡상을 설치하지 아니 하였다.

 

 

 근정전 잡상

 

 동대문 잡상

 

 자선당의 잡상

 

 종묘 정전

 

 

종묘의 잡상

대당사부 (大唐師父)  대당사부는 잡상의 맨 앞자리에 놓인다. 대당사부는 당나라때 현장(玄奬)스님으로 법명이 삼장법사(三奬法師)이다. 삼장법사는 천축으로 불경을 구하러 가는 길에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을 데리고 간다. 천신만고 끝에 불경을 구하여 당나라로 돌아 오는 이야기를 엮은 소설이 서유기이다. 

 


 

 

 

 

우리나라의 잡상은 서유기에 나오는 삼장법사,손오공,팔계등의 명칭을 붙이고 있다.

건축이나 공예의 장식에서 많이 사용되는 문양에는 사신상(청룡 백호 주작 현무 십이지신상 십장생(해 산 불 돌 소나무 달 불로초 거북 학 사슴) 사군자 연꽃 등이다. 그럼에도 삼장법사 손오공등이 건물의 마루에 등장한다.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했던 조선조에서 궁전이나 궁궐과 관련이 있는 건물의 지붕 위에 불교적이라고 할 수 있는 서유기의 등장 인물과 짐승들의 형상을 잡상으로 했었던 점이 의문시 되지만 주로 화마를 다스리게 하는 기원적 의미가 크지 않을까 싶다. 

(서유기에서 삼장법사일행이 화염산에 이르렀을때 대력우마왕의 부인이고 홍해아의 어머니인 나찰녀의 파초선으로  화염산의 불을 끄고 불경을 얻어러 천축에 가는 장면이 연상됨,,그런데 찾다보니 우마왕의 부인 이름이 나찰녀, 철선공주, 칠선공주 등으로 어지럽게 나타나네요,  어떤것이 정확한지 확인해봐야 겠네요)

 

 

 

잡상은 모든 기와지붕위에 설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궁전건물과 궁궐과 관련이 있는 건물에 한정된다. 또한 궁전건물중에서도 양성으로 되어 있는 내림마루와 귀마루에만 배치되고 기와로 마감된 기와마루에는 배치하지 아니하였다. 잡상이 설치되어 있는 건물로는 正殿, 왕의 寢殿, 宮城의 正門, 都城의 城門, ,宮闕 안의 樓亭, 王陵, 王妃陵, 園墓의 丁字閣, 宗廟, 成均館, 東闕 등으로 한정되었다. 

 



 

이광표기자의 [잡상론]



윗글은 인하대 민속학자인 김광언 교수의 글인데 [잡상]에 대한 약간의 다른 해석이 있어 이곳에 게재한다. 어느것이 옳으냐 보다는 비교하는 재미도 쏠쏠하니 잘 읽어 보시기 바란다.

추녀마루 멋내며 잡귀 쫓는 雜像

숭례문이나 광화문 추녀마루를 바라보면 자그마한 장식물 몇개가 눈에 뜨인다. 한줄로 죽 늘어선,  사람 같기도 하고 동물 같기도 한 것들.  거기 삼장법사가 있고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이 있다면….

진흙으로 빚어 만든 토우(土偶·흙인형).  잡상(雜像)이다.  유몽인(柳夢寅·1559∼1623)의 야담집  ‘어우야담(於于野談)’ 에는  ‘신임 관료가 부임해 전임자에게 첫인사를 할 때 반드시 성문 문루(門樓) 위의 잡상 이름을 단숨에 외워야만 들어갈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 잡상이 무엇이길래 옛사람들은 번거로움을 무릅쓰고 추녀마루에 잡상을 장식하고 또 그것을 줄줄 외었던 것일까.

잡상은 조선시대 궁궐의 전각(殿閣)이나 문루와 같이 큰 건축물에만 모습을 나타낸다.  잡상의 임무는 하늘에 떠도는 잡귀를 물리쳐 건물을 지키는 일.  궁궐이나 관아의 건물,  도성의 성문이야말로 왕조의 기강을 보여주는 것이기에 잡귀를 막고자 했음은 당연한 일.  민간신앙의 하나인 셈이다.

그러면 잡상은 어떤 모습일까.  서유기에 나오는 삼장법사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 등을 맨앞부터 순서대로 배치했다는 기록이 있긴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삼장법사를 닮은 사람이나 손오공을 연상시키는 원숭이는 등장하지만 저팔계 사오정은 보이지 않는다.  원숭이 사자 용 봉황 기린 해마(海馬) 물고기 해치 등의 동물이 별다른 원칙 없이 등장한다.

그러나 꼭 하나 지켰던 것은 맨앞엔 언제나 도인(道人) 선인(仙仁)과 같은 인물상이 자리잡는다는 점.  뒷자리 동물들을 이끄는 리더격이다.  그래서 이를 삼장법사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그 얼굴은 변형되어 마치 무사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잡귀를 물리쳐야 하니 그럴 수밖에.

잡상의 수는 5,7,9,11개 등 홀수. 왕과 관련된 건물은 주로 9 개 이상인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늘 그런 것은 아니다.

잡귀를 막아내는 잡상이지만 모습은 익살스럽다. 먼발치에서도 사람에게 호기심과 흥미를 유발시켜주는 잡상. 그것은 기와지붕에 변화를 주고 추녀마루의 멋을 한껏 드높이는 하나의 액센트라 해도 좋을 것이다.

 

 

 

기와

 

한식기와의 종류

우리의 살림집에 한옥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처럼, 그냥 기와였던 우리의 기와는 오늘날 한식기와라는 이름으로 불려지고 있다.
한식기와는 주로 전통건축물의 복원 등에 국한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한식기와는 기본기와, 막새, 서까래기와, 마루기와, 특수기와 등 5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이를 다시 세분하면 그 종류가 20여종이 넘는다고 한다

 

기본기와
가장 기본적인 기와로, 반원형으로 볼이 좁은 수키와(숫기와)와 넓은 암키와(암기와)가 있다. 암키와와 수키와는 지붕에 이어져 기왓골과 기왓등을 만들게 되며 눈과 빗물의 누수를 방지하기 위하여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기와다. 숫기와는 지붕바닥에 이어진 두 암기와 사이에서 이어져 기왓등을 형성하고 암기와는 기왓골을 이룬다.

※ 다른말 : 개와(蓋瓦), 디새
※ 날기와 : 굽지 않고 햇볕에 말려서 만든 기와. 백제에 이 제조법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옛말 : 날디새)

1)수키와 : 반원통 기와. 지붕바닥에 이어진 두 암키와 사이에 이어져 기와등을 형성하며, 남와, 웅와, 부와, 원와, 환와 등으로 부른다. 언강이라는 낮은 단이 있어서 미구가 내밀고 있는 유단식과 없는 무단식 두 종류가 있다.

2)암키와 : 네모난 판형 기와. 지붕바닥에 속면을 밖으로 향하도록 이어져 기왓골을 형성하며, 여와, 자와,평와, 골기와, 바닥기와 등으로 부른다.

 

 

숫기와
반원형으로 되고 끝에 언강이 달린 기와. 바닥기와이음에 덮는 기와
다른말 : 수키와(夫瓦, 牡瓦), 부와, 남와, 동와, 미구기와
수키와는 기와의 한쪽 지름이 다른쪽 지름보다 약간 크거나 작은 토시모양의 무단식과 기와의 한쪽 끝에 언강이라는 낮은 단이 있어서 미구가 내밀고 있는 유단식으로 구분된다. 일반적으로 이들 기와를 토수기와와 미구기와라고 부른다. 유단식 기와의 경우에 미구 앞에 빗물이 새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절수홈이 있는 것이 있으며,기와를 고정하기 위해 못구멍을 뚫어 놓은 것도 있다.

 

 

암기와
오목한 곡면으로 된 장방형의 기와, 바닥에 까는 기와
다른말 : 암키와, 여와(女瓦), 평와(平瓦), 바닥기와
네모난 판형이며 모골에서 성형된 원통 기와를 4등분하여 제작한다.지붕 바닥에 속면을 밖으로 향하도록 이어져 기왓골을 만든다. 두암키와가 서로 겹칠 수 있도록 한쪽 끝면을 조금씩 깍아내어 사용한다.

 

막새
암.수키와의 한쪽 끝에 문양을 새긴 드림새를 덧붙여 제작한 것을 말한다. 목조건물의 처마끝에 사용되는 대표적인 무늬기와로 암막새, 수막새, 이형막새로 구분된다.
처마끝 숫기와, 암기와에 드림새(드림판)을 달아 만든 것. 그 드림새에 무늬, 글자를 넣어 장식한다.
처마끝에 사용되는 대표적인 무늬 기와로 각 시대와 지역에 따라 문양이 다양하다. 수막새, 암막새, 이형막새로 구분할 수 있다.  
다른말 : 와당(瓦當), 묘두와(猫頭瓦), 화두와(花頭瓦), 숫막새(夫莫斯), 암막새(女莫斯). 방초(防草)

1)수막새 : 수키와의 한쪽 끝에 원형의 드림새를 덧붙여 제작한 것으로 기왓등 끝에 사용하며,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계속 사용되었다. 막새의 표면에 연꽃무늬 등 다양한 무늬가 새겨져 있다.

2)암막새 : 암키와의 한쪽 끝에 약간 위로 흰 장방형의 드림새를 덧붙여 제작했으며, 통일신라 직후부터 본격적으로 제작, 사용했다. 막새 표면에 당초 무늬가 중심이 되어 다양한 문양이 시문되었다.

3)이형막새 : 암.수막새와는 달리 그 형태가 특이하고 사용처가 특수한 부위에 한정된 막새. 규모가 아주 작은 소형막새, 반원형의 반원막새, 타원형의 타원막새, 처마모서리에 사용된 모서리기와 등이 있다.

 

숫막새,수막새
드림새(드림판)이 달린 숫기와
다른말 : 부막새(夫莫斯), 수막새, 부당초, 막사
숫기와(수키와)의 한쪽 끝에 원형의 드림새를 붙여서 제작한 기와다. 막새의 중심부에는 동그란 자방이 표시되어 있다. 삼국시대에는 주연부분에 무늬가없는 소문대가 주류를 이루었으며,통일신라 시대 이후에 주연부분에 주문이나 무늬가 새겨지기 시작 했다. 주로 새겨진 무늬는 연꽃,보상화,귀면,금수 등이다. 그중 연꽃무늬가 가장 많이 사용 되었다

 

암막새
드림새(드림판)이 달린 암기와
다른말 : 여막새(女莫斯), 내림새, 여당초, 드림사(그림새)
암막새는 암키와의 한쪽 끝에 약간 굽은듯한 직사각형의 드림새를 붙여 만든 것이다. 통일신라시대에 본격적으로 생산되기 시작한 암막새는 외측에 주문으로 장식된 네모난 주연부분이있고 내측에는당초,보상화당초,포도당초,화엽당초 등과 같은 좌우 대칭의 덩굴무늬가새겨 진것이 많다. 그 밖에 서조,기린,용등의 무늬가 새겨지기도 한다. 암막새는 턱면이 있는지의 여부에 따라 턱면이 있는 유악식과 턱면이 없는 무악식으로 구분된다. 무악식 암막새는 드림새의 폭이 부착된 암키와와 동일하여 턱이 돌출되지 않은 것을 말한다.

 

이형막새
형태가 특이하고 사용처가 특수한 막새를 이형 막새라한다. 이형막새에는 소형막새, 반원막새, 타원막새, 모서리기와가 있다.많이 제작되지는 않았지만 종류는 다양하다.

소형막새
형태는 일반 수막새와 비슷하지만 그 크기가 매우작다. 경주에서 발견된 소형막새는 고신라시대에 제작 된것으로써 지름이10센티미터 내외다. 이러한 소형막새의 사용처는 확실하지 않으나 처마끝 활주위의 차양용이거나 건물내부의 닫집용으로 사용 되었을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반원막새
원형의 수막새를 반으로 갈라 놓은 모양으로 고구려에서만 제작 되었다. 반원막새는 중국 주시대에 원형의 수막새보다 먼저 제작되기 시작했다. 고구려의 반원막새는 수면,두꺼비등의 동물 무늬와 연꽃,화엽,인동등의 식물 무늬가 새겨져있다.반원막새는 지붕이 ㄱ자로꺽이는 회첨에 사용한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타원막새
타원형을 하고 있는 막새로 통일신라 시대에 대부분이 제작 되었다,제작 수법에서 고구려의 반원 막새와 비슷하다. 막새의 주연부분에는 주문이나 당초가 무늬가 있으며 내측에는보상화,연꽃,기린등이 그려져 있다.타원막새의 사용처는 지붕의 처마가 ㄱ자 모양으로 꺽이는 회첨골에 사용된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모서리기와
모서리기와는 통일신라 직후 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했으며 그 형태는 암막새의 뒷부분에 부착되어 있는 암키와를 삼각형으로 절단한다음 두개를 붙여만든 모양이다. 처마모서리에 사용한 기와다. 암.수키와의 한족 끝에 문양을 새긴 드림새를 덧붙여 제작 한다. 처마끝에 사용되는 대표적인 무늬 기와로 각 시대와 지역에 따라 문양이 다양하고 제작수법이 다르기때문에 당시의 문화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역할을 한다.

 

서까래기와
서까래가 처마끝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서까래의 부식을 막고 장식을 하기 위하여 서까래기와를 사용한다. 서까래 기와의 특징은 일반적인 막새모양과 같은 형식으로 제작되지만 막새처럼 뒤에 붙는 기본기와가 없고 중심부에 못구멍이 뚫려 있어서 고정 시키게 되어 있다.
중심부에 뚤려 있는 구멍은 네모 낳거나 동그란데 대부분이 네모 구멍이 뚫려있다. 연목기와는 조선선시대에 이르러서 단청으로 대체 되었다.  

연목기와
둥글고 긴 연목 끝에 사용되는 원형의 기와. 삼국시대부터 제작, 사용되기 시작하여 특히 백제시대에 성행했으며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까지 사용되었다. 문양은 수막새의 무늬와 비슷하다.
수키와가 부착되지 않은 수막새와 유사한 원형의기와로 중심부에 구멍이 뚤려있다.

부연기와
연옥 끝에 덧엊은, 네모지게 짧고 서까래인 부연 끝에 사용하는 방형의 기와. 기와집의 겹처마를 형성하는 연목과 부연은 각각 둥글고 네모져 그 끝을 막음하는 기와의 모양도 서로 차이가 난다.
부연기와는 삼국시대 말부터 제작되기 시작하여 고려중기까지 사용되었으나 출토된 것은 소수라 한다. .부연기와에 새겨진 문양은 연꽃,보상화등이 간략하게 표현되어 있다.

사래기와
추녀끝에 잇대어 댄 네모난 사래 끝에 사용하는 기와로 다른 서까래 기와 보다 크다. 사래기와는 삼국시대 후기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고려시대까지 제작되었다. 삼국시대에는 주로 연꽃무늬가 새겨졌고 통일신라 시대에는 귀면 무늬가 주류를 이루었다. 경주안압지에서 출토된 귀면무늬 사래기와는 운두방형으로 주연부에 꽃무늬가 새겨지고 그 내측에 귀면이 의장되있으며 중심부에 못구멍이 뚫려 있다.
귀면이 새겨져진 사래기와는 마루끝에 사용되는 귀면기와 거의 같은 모양인 원두방형이며 그 하단부에 반원형의 홈이 파여 있는 것이 마루용이고 홈이 없는 것이 사래용이다.

토수
처마 모서리에 돌출된 서까래인 추녀 끝이나 사래 끝 마구리를 장식하는 장식기와.
토수는 고려후기부터 출현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정면은 이무기나 잉어 같은 형상으로 만들어졌으며 뒤쪽은 서까래 끝에 씌워질 수 있도록 구멍이 나있다. 토수는 궁전이나 관아 건물에 사용되었다. 
 

 

 

마루기와
마루는 용마루, 내림마루, 추녀마루(귀마루) 등으로 구분된다. 마루를 치장하기 위해 많은 종류의 기와가 사용되어 왔다. 마루기와에는 마루를 축조하기 위한 적새, 착고, 부고가 있고 그 외에 마루를 장식하기 위한 취두, 용두, 치미, 잡상, 망새 등이 있다. 

1)마루 축조용 기와 : 각 마루를 쌓아 올리는데 사용된다.
적새 : 대개 암키와를 세로로 반절하여 사용하거나 원형 그대로를 이용, 암마룻장.암마룻장기와로 부른다. 상단에 별도로 원형의 수키와를 얹어 마루의 미관을 돋보이게 했다. 수마룻장.수마룻장기와라 한다.
착고 : 적새나 부고 밑의 기왓골을 막음하는 기와로 수키와 양쪽을 알맞게 절단하여 사용한다.
부고 : 착고위에 잇대어 옆으로 얹혀지는 기와로 완형의 수키와를 그대로 사용한다.

2)마루 장식용 기와 : 마루 끝에 삽입되거나 그 위에 얹어져 장식적인 효과를 나타내는 기와이다.
치미 : 용마루 양쪽 끝에 사용되는 큰 조형물로 길상과 벽사의 상징이다. 고려 중기 이후로는 용두, 취두 등의 새로운 장식 기와가 나타나 치미를 대체했다. 조선의 기왓집은 치미대신에 취두나 망새가 장식되었다.
취두 : 용마루 양쪽 끝에 얹어지는 괴상하게 생긴 새머리 모양의 조형물이다. 치미와 같은 길상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는데, 고려 중기 이후 용두와 함께 새롭게 나타난다.
용두 : 내림마루나 귀마루 위에 얹어지는 조형물로 용의 머리를 무섭게 형상화한 장식 기와로 길상과 벽사적인 성격을 지닌다. 고려 중기 이후 조선시대에 매우 성행했고 조선의 궁전이나 관아건물에서 흔히 볼 수 있다.
귀면와 : 괴수와 같은 귀신의 얼굴을 입체적으로 조각한 원두방형의 기와로 통일신라때 매우 성행했다.
망새 : 치미나 취두 그리고 귀면기와 등이 장식되지 않은 마루 끝 상단에 사용되는 기와. 대개 암막새의 드림새가 위로 향하도록 거꾸로 얹는다. 망와, 바래기라고도 부르며 조선시대에 매우 성행했다.
마루수막새 : 원형의 드림새에 접합된 수키와가 긴 원통형이거너 등이 굽은 짧은 원통형인 특이한 모습의 기와이다.
마루암막새 : 암막새가 암키와의 선단에 거꾸로 접합되어 있는 기와이다.
잡상 : 내림마루나 귀마루 위에 한 줄로 앉히는 여러 가지 모양의 조상으로 건물을 수호하고 각 마루를 장식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적새
마루를 축조하기 위한 것으로 암마룻장 기와라고도 한다. 적새는 암키와를  그대로 사용하거나 세로로 반을 짤라 사용한다. 암키와를 뒤집어(지붕에 기와를 올릴 때와 반대로)5장에서 9장 정도를 쌓게 된다. 마루의 미관을 돋보이게 하기 위하여 맨 마지막에 수키와를 얹는데 이를 숫마룻장 기와라고 한다.

 

착고/부고
기와를 지붕에 이을 때 맨위의 연결부분에는 공간이 생기게 되고 이를 막기 위해 착고라는 기와를 사용한다. 착고는 수키와가 굳기 전에 (生瓦)양쪽 끝과 옆면을 잘라 만들게 된다. 부고는 착고 위에 얹히는 기와로 규모가 큰 기와집에서 마루를 더욱 보기 좋게 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기와다.

 

치미
큰 독수리의 꼬리모양으로 된 용마루 장식기와
용마루의 양쪽 끝에 올라가는 조형물이다. 치미의 발생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일반적으로 길상과 벽사의 의미를 지닌 봉황에서 비롯 됐다고 한다. 중국 한나라때에는 치미를 반우(反羽)라 불렀고 진나라때에는 치미라 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통일신라 시대에는 누미(樓尾)라고 불렀다.

 

취두 용두
용마루(용마름. 기와지붕에서 제일 높은 곳에 만든 마루) 끝에 대는 장식기와
취두는 용마루의 양쪽 끝에 얹혀지는 조형물이다. 대부분의 취두는 이상하게 생긴 새의 머리모양을 하고 있으며 옆면에는 귀면이나 용의 그림이 새겨져 있다. 취두는 용두와 함께 고려중기에 치미 대신 사용되기 시작했다. 용두는 내림마루나 추녀마루의 하단부에 얹혀지는 조형물로 용의 머리를 무섭게 표현한 장식 기와다. 용두는 취두와 함께 고려시대부터 제작되기 시작하여 조선 시대에 성행했다.

 

귀면와 다른말 : 귀면기와
지붕마루끈, 추녀 사래면에 세워대는 귀면모양을 새긴 장식기와
수면(獸面)의 모양을 형상화한 기와로 마루끝에 부착되는 마루용 귀면 기와와 추녀마루 끝에 부착하는 사래용 귀면기와가 있다. 마루용 귀면기와는 기왓등에 얹혀지기 위해 밑부분에 반원형의 홈이 파여져 있으며 사래용 귀면기와는 상단 중앙에 못구멍이 뚤려있는 것과 뒷면에 고리가 있어 줄로 묶을 수 있는 두 종류가 있다. 통일신라시대에 와서 귀면기와가 성행하였고 유약을 바른 녹유 귀면기와가 많이 제작 되었다. 귀면기와는 악귀를 막아내려는 벽사의 상징으로 지붕에 부착되었다.

 

망와(望瓦)  다른말 : 망새, 바래기기와, 귀면와
지붕마루 끝에 엎어대는 내림새 모양의 기와. 각 마루 끝에 설치하는 기와. 암막새처럼 만들거나 짐승의 머리, 독수리의 머리, 도깨비의 얼굴, 물고기의 꼬리 등의 형상을 얹는 것으로 살림집에서는 주로 암막새처럼 만든 것을 사용한다.
소규모건물의 마루끝 상단에 사용 되는 기와로 조선에 와서 매우 성행했다. 망새는 망와, 바래기라고도 불리우며 치미나 취두, 귀면귀와와는 다른 것이다. 망새기와를 따로 제작하기도 했지만 일반적으로 암막새를 꺼구로 세워 얹어 놓는다.

 

마루수막새/마루암막새
마루수막새는 마루의 곡선미를 강조하기 위하여 귀면기와 상단에 얹혀지거나 모서리기와 위에 사용되는 기와다. 원형의 드림새에 원통,이나 등이 휜 짧은 원통이 붙어 있는 모양을 하고 있다. 마루암막새는 암키와의 끝에 암막새가 거꾸로 붙어 있는 기와다. 아직 정확한 용도가 밝혀지지 않았다고 한다.

 

잡상
수호신.수호수를 상징하는 귀마루(용마루. 합각마루. 추녀마루들 중에서 귀에 있는 마루).내림마루의 장식기와
맞배지붕일 때 에는 내람마루 끝에,우진각 지붕이나 팔작지붕에서는 추녀마루끝에 일렬로 앉히는 여러 가지 모양의 조상(調象)을 말한다. 명나라에서 영향을  받아 조선시대에 성행 했던 잡상은 3마리에서부터 11마리 까지 3,5,7,9,11의 홀수로 앉혀진다.

 

특수기와
기와가 그 본래 목적인 목조 건물의 지붕에 이어지지 않고 특정한 장소에 사용되거나 그 용도가 다른 목적으로 전용되어 다른 목적으로 이용되고 있는 기와류이다. 담장용, 배수로용, 전탑용, 기단용, 장식용, 무덤용 등 여러 가지가 있다.


 

경복궁의 기와지붕

 

 

기와는 우리 나라 전통 건축의 기본적인 요소이다.

 

 

기원전 그리스에서도 발견되었다고 하는 기와가 우리 나라에 처음 소개된 것은 낙랑시대. 그 후

 

 

로 건축물의 보편적인 지붕재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현대건축물이 들어오기 이전까지 우리 나라에서 지어진 많은 집과 건물의 지붕은 기와로 만들어

 

 

졌다. 특히 임금이 살던 궁의 기와지붕은 그 웅장함과 멋스러움에서 기와지붕의 백미로 불리운

 

다.

 

 

경복궁의 기와 지붕들을 담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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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시대의 기와사진 모음

1 신라

              

 

              

               연화문사래기와 蓮花文望板瓦 Roof-end tile with lotus design, earthenware
皇龍寺址 / 新羅 / 너비 35.5~40.0cm, 높이 45.7cm, 두께 3.8cm / 國立慶州博物館 / 皇 98
              

               인면문수막새 人面文圓瓦當 Roof-end tile with face design, earthenware
               靈廟寺址 / 新羅 / 현재길이 11.5cm, 두께 2.0cm / 國立慶州博物館 / 慶州 1564

              

               연화문수막새 蓮花文圓瓦當 Roof-end tile with lotus design, earthenware
              月城 / 新羅 / (左)지름 14.3cm, 두께 1.2cm, (右)지름 14.5cm, 두께 0.7cm /

              國立慶州博物館 / (左)月城 379(3-1), (右)月城 379(3-2) 
                 

                 연화문수막새 蓮花文圓瓦當 Roof-end tile with lotus design, earthenware

                 月城 / 新羅 / 지름 16.7cm, 두께 2.4cm / 國立慶州文化財硏究所

 

2 백제

 

                

                 연화문수막새 蓮花文圓瓦當 Roof-end tile with lotus design, earthenware
                 大通寺址 / 百濟 / 지름 13.5cm, 두께 1.6cm / 公州敎育大學校博物館

3 고구려

 

                

                 연화문수막새 蓮花文圓瓦當 Roof-end tile with lotus design, earthenware
                 太王陵 / 高句麗 / 지름 20.9cm, 두께 1.2cm / 國立中央博物館 / 本 6340

 

통일신라시대 기와사진 모음

 

                

                 치미 Ridge-end tile, earthenware 統一新羅 / 높이 104cm /

                

                 연화문곱새기와 蓮花文望瓦 Roof-end tile with lotus design, earthenware
                 雁鴨池 / 統一新羅 / 지름 14.5cm / 國立慶州博物館 / 雁 388

                

 당초문모서리기와 唐草文隅瓦 Roof-end tile with arabesque design, earthenware 雁鴨池 /

 統一新羅 / 현너비 27.7~29.0cm, 높이 3.5cm, 두께 1.5cm / 國立慶州博物館 / 雁 636(6-1)

               

                在城」銘수막새 「在城」銘圓瓦當 Roof-end tile with inscription, earthenware
                統一新羅 / 지름 15.8cm, 두께 1.2cm / 崔容大

                          

                      귀면와 鬼面瓦 Roof tile with monster-mask design, earthenware
皇龍寺址 / 統一新羅 / 너비 23.3cm, 높이 27.7cm, 두께 4.5cm / 國立慶州博物館 / 皇 114

                

                 귀면와 鬼面瓦 Roof tile with monster-mask design, earthenware
       統一新羅 / 너비 35.8cm, 높이 16.0cm, 두께 6.2~9.3cm / 國立慶州博物館 / 慶州 2717

                

                 용문암막새 龍文平瓦當 Roof-end tile with dragon design, earthenware
雁鴨池 / 統一新羅 / 현재너비 14.3cm, 높이 6.1cm, 두께 1.5cm / 國立慶州博物館 / 雁 614(4-3)

                

                 기린문타원막새 麒麟文楕圓瓦當 Roof-end tile with kylin design, earthenware
                雁鴨池 / 統一新羅 / 지름 11.2~17.5cm, 두께 2.2cm / 國立慶州博物館 / 雁 805

                

                 비천문암막새 飛天文平瓦當 Roof-end tile with apsara design, earthenware
                 靈廟寺址 / 統一新羅 / 너비 32.1cm, 높이 10.0cm, 두께 3.3cm / 朱晋弘
                

                 불상문수막새 佛像文圓瓦當 Roof-end tile with Buddha design, earthenware
                 統一新羅 / 지름 13.2cm, 두께 2.8cm / 國立慶州博物館 / 慶州 729

 

 

               

 

                  

 

 

 


 

 

담장

 

낙선재의 담장

 ▲ 지붕과 굴뚝을 함께 보아야 제멋이 나는 낙선재 꽃담

 

 ▲낙선재 상량정과 꽃담

 

꽃담은 낙선재 행각을 두르고 언덕을 쉬엄쉬엄 타고 올라 상량정 동산에서 멎는다. 지붕을 뚫고 솟아 있는 몇 개의 굴뚝은 꽃담과 썩 잘 어울린다. 바깥 담의 꽃담이라 품위가 있으면서 절도 있게 보이기 위해 밑 부분은 사고석을 고르게 쌓고, 그 위에 다른 무늬 없이 석쇠무늬(귀갑무늬)로 장식했다.

 꽃담은 건물의 벽을 이루는 벽체와 담장으로 나눌 수 있는데 낙선재 누마루 밑의 벽체는 눈여겨볼 만하다. 직선과 점선의 무늬도 아니고 육각형이 연이어 있는 석쇠무늬도 아니다. 직선으로 구획하여 사각형, 마름모꼴 등의 무늬를 넣어 기하학적 추상화를 보는 듯 현대적 감각이 돋보인다.

꽃담은 문과 어울릴 때 멋이 더하다. 건물과 건물 사이 혹은 후원으로 통하는 샛담에는 일각문이라고 하는 조그마한 문이 딸려 있다. 낙선재에서 석복헌으로, 석복헌에서 수강재로 넘어가는 곳에도 있고 후원 샛담에도 있다.

이 중에 여성들의 전용 통로였을 법한 좁고 후미진 공간에 있는 석복헌 일각문은 한 쪽 담에 포도무늬와 매화나무를 장식해 놓아 눈길을 끈다. 매화는 지조와 절개를, 포도는 다산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인들이 거주하는 건물 뒤쪽에 주로 그려 넣었는데 경복궁 자경전 담장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포도나무는 세 송이의 포도를 매달고 있는데 포도송이를 셀 수 있을 정도로 사실적이어서 마치 그림을 보는 것 같다.

 

 한정당과 상량정을 넘나드는 일각문을 가운데 두고 양쪽 무늬를 달리하여 변화를 준 꽃담

왼쪽은 사고석을 높게 쌓고 그 위에 전돌로 점선무늬를 놓았고 오른쪽엔 담 높이의 반은 사고석으로 쌓고 그 위의 반은 다시 세로로 반을 나누어 왼쪽엔 석쇠무늬를, 오른쪽에는 점선무늬를 표현하여 단조로움을 피했다.

 

▲ 만월문과 꽃담

꽃담과 문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곳이 상량정에서 승화루로 통하는 만월문이다. 승화루 쪽 담장 무늬가 더욱 화려하여 볼만하나 만월문이 굳게 닫혀 상량정 쪽에서만 볼 수 있다. 문지방은 화강석으로 쌓고 원은 전돌로 둥글게 쌓았다. 둥그런 문 옆으로 지형의 높낮이에 맞춰 2층의 장대석을 쌓고 그 위에 3층의 사고석을 쌓은 뒤 전돌로 점선무늬를 표현하여 전체적으로 세련되고 깔끔한 멋이 난다.

 

▲ 무늬가 끝없이 이어지는 무시무종(無始無終)의 꽃담

 낙선재 꽃담의 하이라이트는 상량정이 있는 동산과 낙선재 후원을 구분하는 긴 꽃담이다. 이 담이 담고 있는 표정에는 독특한 아름다움이 스며 있다. 직선과 곡선이 치밀하게 구성되어 있고 그 무늬가 끝없이 이어져 끝도 시작도 없는 무시무종(無始無終)의 의미를 담고 있다.

후원의 꽃담과 굴뚝 

꽃담은 화계와 굴뚝과 어울려 더욱 운치를 낸다. 낙선재 후원에는 동산의 지세에 따라 화강암을 곱게 다듬어 몇 단의 화계를 쌓고 화계 위에 굴뚝을 세워 놓았다. 우리는 구들이라는 독특한 난방문화를 가지고 있어 한옥에 굴뚝이 없을래야 없을 수 없는 구조인데, 굴뚝을 보기 싫다고 하여 감추려 하지 않고 오히려 드러내 놓아 굴뚝을 하나의 장식물로 여겼다.

굴뚝을 만들더라도 주위 환경, 예를 들어 꽃담의 빛깔과 그 무늬를 고려하여 만든다. 굴뚝은 잘 알려진 대로 경복궁의 아미산의 굴뚝과 자경전의 십장생 굴뚝을 최고라 치는데 그 색깔은 모두 붉은 황토색을 띠고 있어 화려하게 보인다. 이는 꽃담의 전체적인 색깔과 크게 동떨어지지 않는다.

낙선재의 굴뚝은 꽃담과 같이 전체적으로 잿빛을 띠고 있는데 빛깔과 무늬가 조화를 이룬다. 경복궁의 꽃담과 굴뚝처럼 붉은 색을 전혀 사용하지 않은 이유가 낙선재가 단청을 하지 않은 이유와 같은지 모르겠다.

 

 

1.한국인의 심성이 배인 꽃담

담에 새겨진 자연의 이야기들


여염집이나 궁궐 등 집의 벽체나 담에 형상과 부조 등의 다양한 모양과 무늬를 넣은 꽃담은 한국인의 구수한 심성이 배어 있다. 이런 꽃담에는 자연 속에 사는 마음과 담이 있으므로 해서 생겨난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꽃담에 숨겨진 이야기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벽체나 담장에 여러 가지 무늬로 치레를 하였다. 치레하는 것을 ‘무늬놓는다’라고 하며, 무늬를 놓아 장식한 벽면을 통털어 꽃담이라 한다. 우리말로는 꽃담이라 하나 한자어를 차용해 화담, 화초담, 화문담이라 하며, 혹은 무늬담, 그림담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두메산골 이름 모를 농부가 토담에 꾹꾹 박은 기왓조각의 투박한 솜씨에서 경복궁 대조전 뒤뜰 굴뚝에 전돌로 쌓은 십장생의 꽃담에 이르기까지 우리네 꽃담은 화려하지만 야하지 않은 우아한 멋을 풍긴다.


언제부터 꽃담을 만들어 그 아름다움을 즐겼는지는 모르지만 <삼국사기> 권 33 ‘옥사’에 ‘진골 계급은 담장을 꾸미지 못한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삼국시대에 꽃담의 역사가 펼쳐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왜 담장이나 벽체에 무늬를 그려 넣기 시작했을까? 담이란 것은 부지의 경계가 정해진 구역에 연속적으로 설치된 가설물로, 통행을 금지하고 도난을 방지하며, 사람들이 들여다보는 것을 막기 위해 설치한다. 담은 집을 감싸는 역할이 중요한 만큼 점점 튼튼하고 강하게 만들어졌다.


 

 

 

 

 

 

 

 

 

 

 

 

 

 

 

 

이렇게 담이 실해지면서 반대로 부드럽고 아름답게 꾸미려는 모습이 보이는데, 해와달, 별을 무늬 놓아 꾸미기도 하고 학, 거
북, 불로초와 같은 십장생을 수놓기도 했다.

이는 대자연 속에 사는 사람들의 마음을 드러내기 위함이며, 또한 담이 생기면서 생긴 복잡하고 미묘한 많은 사연들을 표현하는 수단이 되었던 것이다.

타인을 철저히 배제하고 접근 금지라는 표정으로 차갑게 서 있는 도심지의 콘크리트 담들 속에서 옛 조상들이 자연과 더불어 서로의 이야기를 담았던 꽃담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

 

 

2.자연의 이야기가 담긴 꽃담

꽃담의 장식에 깃든 자연의 지혜


자연 속에 사는 마음과 인간의 많은 이야기가 담긴 꽃담에는 또한 자연에 대처하고 순응하는 지혜가 깃들어 있다. 악을 멀리 하고 복을 받기 위해 점선과 직선, 면을 응용하여 다양한 무늬를 수놓았으며 흙, 돌, 기와를 이용해 돌각담, 토담, 화문장 등의 담을 만들었다.

사람들은 자연의 시험 속에서 지혜를 배우고, 신의 존재를 깨닫게 되어 자연의 이치와 신의 섭리에 대처하고 순응하는 방법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신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기 위해 제사를 지내고, 귀신을 쫓아 재난을 막는 방법을 궁리하게 되었다. 꽃담의 무늬는 감상하기 위한 치장이나 장식일 뿐 아니라 이런 맥락에서도 이해될 수 있다.

 

꽃담의 무늬는 점선, 직선, 면을 기본으로 이들을 이용한 다양한 변형으로 표현되고 있다. 신륵사(神勒寺) 구광루(九光樓)의 합각은 회색 삼화토 바탕에 기왓조각을 띄엄띄엄 넣고 그 아랫면을 알맞은 돌들로 구성하여 자연스레 일정 간격을 만드는 점선 무늬로 되어 있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점선 무늬의 백미는 일월성신(日月星晨)의 무늬이다. 이는 기와로 무늬를 형성하면서 화강석 세 개를 둥글게 다듬어 해, 달, 별을 표현하는 것인데 이로 구성한 예는 조선조 태조의 능에서 찾을 수 있다.

전을 맞이음 하여 화장줄눈을 쓰지 않고 곧은 선을 만든 직선 무늬는 윤곽을 두르거나 강조할 때 쓰인다. 직선무늬는 단순히 일직선으로만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모서리에서 매듭을 짓듯 꾸미기도 한다.

직선과 면으로 구성된 석쇠 무늬(거북등 무늬)는 그물을 엮은 모양이라 하여 악귀가 이 그물에 걸려 재앙을 피할 수 있다고 사람들은 생각했다. 그 중앙에 꽃무늬를 넣은 것은 벽사(辟邪)한 후 다시 꽃처럼 행운이 가득 하라는 길상(吉祥)의 의미이다.

역시 운기(運氣) 무늬도 직선과 면으로 구성된 것으로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조화를 담고 있다.
ᅡ, ᅥ, ᅩ, ᅮ의 구성 원칙에 따라 7×7 즉, 49칸 속에 3,5 조합으로 조립하면 저절로 卍자 무늬가 드러난다. 이는 천지 조화의 이치를 표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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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경전의 꽃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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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경전 꽃담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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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경전 꽃담 외부

 


 

 

 

 

 

 

 

 

 

꽃담은 쌓는 재료에 따라 그 구조와 치장이 달라지는데, 제주도 민가나 남한산성에서 볼 수 있는 돌각담은 바닥에 굵은 돌을 놓고 위로 가면서 작은 돌을
차곡차곡 쌓은 담장이다. 돌과 돌 사이에 흙을 메기거나 줄눈을 치지 않는 것이 특징으로 중간쯤 수키와 두 개를 맞대서 둥글게 만들어 간격을 두고 계속해 나가면 일월성신(日月星晨) 무늬의 담장이 되기도 한다.

토담은 흙덩어리를 빚어 쌓아올리거나 거푸집을 만들어 흙을 채워 다지고 그 위에 다시 거푸집을 만든 다음 흙을 채워 단계적으로 완성해 가는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눈박이한다’고 하여 돌을 쌓거나 깨진 기와를 넣어 기와의 곡선을 이용한 파상선(波狀線)을 만들기도 하며 간단한 식물의 형태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돌의 크고 작은 데서 오는 차이를 이용하거나 이어져 있는 면적의 차이로 무늬를 넣은 것은 토석담이다.
토석담은 돌과 진흙, 혹은 백토 등과 엇바꾸어 쌓아올려 키를 맞추기도 하고 기왓조각을 넣어 변화를 주기도 한다.

서울 일반 살림집의 안마당 한쪽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화문장은 소나무나 십장생 무늬를 넣어 생동감을 준다. 그림담이라고도 불리는데, 돌을 쌓은 부분 위쪽에 사벽질(再砂壁)을 해서 담장의 표면을 평평하게 하고 그림을 그린 것이다. 좁은 안마당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생동감과 활력을 주어 아낙네들
의 큰 즐거움이 되었다.

주기적으로 또는 돌연히 쉼없이 변화하는 속에서 오랜 경험과 지혜를 응용한 우리 꽃담은 자연의 아름다움과 벽사진경(辟邪進境)을 담았다. 그러면서도 살아숨쉬는 대자연의 일부로 현대의 그것과는 다른 멋으로 고고히 서 있다.

 

담장

 

  담 대신에 풀이나 나무 등을 얽어서 집을 둘러막거나 경계를 가르는 것을 ‘울(울타리)’이라고 하는데, 이 말도 옷과 같은 낱말겨레에 드는 분화어로, ‘위(上)’의 뜻을 의미소로 하는 형태이다. 짐승을 가두기 위하여 둘러막은 공간을 ‘우리’라고도 한다. ‘소 우리, 돼지 우리, 염소 우리’가 바로 그러한 이름들이다.

‘울/우리’는 한정된 공간을 나타낸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다고 하겠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운명 지워진 공간과 시간에서 살고 있다. 너와 나를 함께 뭉뚱그린 복수의 개념으로서의 ‘우리’ 또한 소 우리의 ‘우리’와 같은 말에서 발달하여 다른 뜻으로 갈라져 나간 형태라고 하겠다. 물론 우리말의 인칭대명사에 나와 너를 합한 호칭이 없어 이른바 보충법에 따른 공간을 가리키는 ‘우리’가 인칭대명사로 쓰이게 되었다. 그러니까 특정한 공간을 바탕으로 하여 특정한 공간에 사는 사람들을 합쳐서 그냥 ‘우리’라고 했으니, 마치 당호(堂號)가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나 같다고 하겠다.(우리말의 상상력 237쪽,정호완,정신세계사)

 

  한마디로 담장은 너와 나를 혹은 우리를 구분 짓고자 만든 울타리로 꽤나 폐쇄적인 우리의 가족문화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보아진다.

담장의 기원은 제대로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자신의 영역을 표시하고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가족과 재산을 보호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인 만큼 사회의 구성원이 분화되고 사유재산이 생겨남으로써 차츰 만들어져 왔을 것으로 짐작된다.

<삼국사기> 옥사조(屋舍條)의 기록을 보면 그 당시 이미 담장이 원래의 기능을 넘어서서 장식적으로 꽤나 발전이 되어 최상지배층인 성골을 제외하고 신분의 차등에 따라 규제를 달리 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진골은 회랑(回廊)을 돌릴 수 없으며 담장에 석회를 바르지 못하게 하였고, 그 아래 계층들은 담장의 높이까지도 각각 규제를 받았었다.

이후 고려 때도 한층 성행을 하였고 조선시대 들어와서는 초창기 세종 때 서울에 큰 화재가 발생한 후로 화재예방을 위한 화방담(火防墻)이 한때 장안에서 유행을 하기도 하였다.

 

 

담장의 유형은 우선 사용된 재료를 기준으로 보면

 

 대나무,싸리나무,억새 등으로 만든 바자울,

 탱자나무나 사철나무 같은 생나무로 된 생울타리,

 

 흙을 사용한 토담,

 

 돌만 사용한 돌각담(강담),

 

 돌과 흙을 함께 사용한 토석담,

 

 기와만 사용한 와편담

 

 기와와 흙 등으로 한껏 맵시를 부린 와편토담

 

 전돌을 쓴 전돌담 등으로 나누어볼 수 있으며

 

 돌과 기와 등으로 두 가지 이상을 혼용하여 조성하기도 하였다.

 

다음 형태적인 구분으로는

 

 돌각담 중 사고석(四塊石:장정 혼자 네 덩이 정도를 들 수 있는 돌)으로 쌓은 사고석담,

 

 전돌로 여러 가지 상징문양을 새겨놓은 꽃담(花墻), 영롱장(玲瓏墻) 등이 있다.

 

또 방법적인 특징으로 사고석이나 전돌에 우리의 전통적인 면회법(面灰法)이라 하여 서양식과는 반대로 줄눈을 도드라지게 하여 그 줄눈으로 상징이나 글씨를 새겨 넣기도 하였다.

그리고 만드는 기법으로 보자면 홑담(편축)과 맞담(협축)이 있는데,

홑담은 돌을 담 벽면의 한쪽만 쌓고 반대쪽은 다르게 하는 것으로 건물의 화방벽 같은 식이며

 맞담은 돌을 양쪽으로 쌓아올린 것으로 대개의 돌담이 이러하다.

 

 

한국전통 담의 조형성

 

Ⅰ. 서론  

우리는 오랜 역사 속에서의 우리 민족의 생활 양식과 정서를 통하여 표현된 특유의 전통 건축을 가지고 있다.

서양의 건축이 건물만으로 이루어진 것과 달리 우리의 생활은 마당이 중심이 되어 이루어지고, 마당과 함께 담(墻)은 건축의

일부가 되며 또한 주변 자연 환경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

일반적으로 담(墻)이 내부 공간과 외부 공간을 구획하여 심리적인 안정을 가져다 주는 가장 중요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의 담(墻)은 그러한 기능을 넘어 건축물과의 조화를 생각하며 자연과 신의 섭리에 대처하고 순응하는 선인(先人)의 뜻과 사상을 담아

축조하였음을 알 수있다.

따라서 한국 전통 담(墻)이 가지고 있는 조형적 특징과 의미를 올바로 이해하고자 담(墻)이 갖는 의미와 발생 및 축조 방법에 관하여 조사하고

조형의식에 영향을 주는 지형적 특징과 사회적, 공간적인 지각경험을 바탕으로 현존하는 주택, 궁궐, 사찰 등의 담(墻)을 중심으로 그 조형성을

연구한다.


Ⅱ. 한국의 담(墻)에 관한 고찰  

1. 담(墻)의 의미와 발생

담(墻)은 건물 대지의 경계 또는 시설물의 주위에 둘러막은 낮은 구축물로 한자로는 ‘墻’이라 쓴다.

이 墻은 ‘牆’의 속자(俗字)이고 이는 ‘牆’이라고도 쓴다.

여기서 牆은 대한건축학사전에 의하면 ‘둘러쌓을 장’이고 ‘墉’은 ‘담, 용’으로 ‘垣也’라하였으니 ‘垣’과 같은 뜻이다.

또 ‘垣’은 ‘낮은담, 원’ 으로 ‘卑墻’의 뜻으로 이는 곧 ‘寮’가 ‘에워쌓은 담, 요’로 풀이 되어 ‘周垣’이라 한 것을 생각할 때 이상 네가지 墻, 墉, 垣, 寮는 모두

같은 뜻임을 알 수 있다.

이상에서 공간을 둘러막는 의미와 침입자를 방어(防禦)하는 기능과 함께 시각적인 차폐의 기능도 갖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담(墻)의 발생은 수렵시대부터 농경 사회로 들어와 한 곳에 정착하면서 농사를 지어 곡물을 비축하면서 짐승이나 외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구축물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를 위해 생긴 것이 바로 방어적 성격의 담(墻)이다.

인간이 안식과 평화로운 삶을 영위하기 위해 외부 세계로부터 보호할 외적인 수단의 필요성에서 창고와 담(墻)을 만들었던 것이다.

한국의 담(墻) 건축은 문헌상에 나타난 것으로는 중국 문헌인 삼국지위서 동이변진조(三國志魏書東夷辨辰條)에 ‘역유성곽(亦有城郭)’이라 하였다.

이는 담(墻)의 확대물인 성곽의 존재는 곧 담(墻)의 존재를 암시해 주는 것이다.

또 이보다 후인 5세기경 고구려 고분 평남용강안성동대총(平南龍岡安城洞大塚)의 전실남벽루각도(前室南壁樓閣圖)(그림1)에는 조선시대 건축물이나 담(墻)과

다를 바 없는 누각 건축과 담(墻) 건축이 나타나 있다.

이 벽화의 하단 중앙부에는 누각으로 보이는 높은 우진각 지붕의 건물이 있고 그 뒤로 우측에도 두 채의 우진각 지붕의 건물이 보인다.

이들 건물의 좌우로 맞배지붕을 한 건축물이 보이고 이것은 누각 뒤에 있는 것으로 담(墻)으로 해석된다.

삼국사기에는 신라의 주택 규모를 언급하는 중 ‘원장불시양동(垣檣不施梁棟)’에서 양동(梁棟)은 ‘들보, 양’, ‘들보, 동’으로서 ‘도리’와 ‘들보’를 말한다.

조선시대 궁궐 담장에서 사고석으로 쌓은 후 그 위에 기와로 지붕 마루와 지붕골을 형성, 기와와 지붕을 만든 후 그 처마 밑에 등근 서까래 모양 둥근 보를 수평으로

보낸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둥근 보가 곧 ‘梁棟’으로 해석되며, 이는 뚜렷이 담(墻)의 존재를 입증하여 주고 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담(墻) 건축은 더욱 발달하여, 의장적으로도 많은 진보를 보았다.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는 장가장(張家檣)이라는 기록이 고려사에 기록된 것을 보아 장대한 규모를 알 수 있으며, 바깥 담(墻)에 화초 문양으로 화려하게 장식하였음을

보여주는데 이는 고려 말기에 조선시대의 화문담(花文墻) 양식이 건축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상과 같은 문헌이나 벽화에 의한 담(墻)의 존재는 제외하고, 현존하는 담으로써 고찰 가능한 것은 조선시대(朝鮮時代)에 이르러서이다.


2. 담(墻)의 분류

담(墻)의 구조는 사용 재료를 어떻게 축조 하였느냐에 따라 형태가 달리 나타난다.

재료들은 각각의 성질에 따라 활용되며 그 특성에 따라 고유한 양상을 나타낸다.

 

담(墻)의 축조 방법에 따라 고찰하면 다음과 같다.

(1)생울(生垣)산간 지방이나 농촌의 주택에서 널리 사용하는 담(墻)으로 살아있는 나무를 (垈地)의 경계선을 따라 심어 그 자체가 하나의 울타리 역할을 하게 한 것이다.

가시나무, 개나리, 탱자나무 등이 심어지며 주변의 자연 요소와 잘 어우러진다.(그림2)

(2)울타리(籬)보통 ‘울’이라는 것으로 인류의 원시적 주거는 울타리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주로 나뭇가지로 만들었으며, 울(籬)은 이락(籬落), 파리(巴籬, 藩籬),

바자울(芭子籬) 등으로 불린다.

이는 나뭇가지, 싸리가지, 수수깡 등을 짜서 만드는 농가에서 가장 널리 이용되는 것중의 하나이며 엮는 방법을 달리하여 변화를 준다.

(3)죽책(竹柵)농촌 주택에서 주로 나타나고 있는 담의 형태이며, 대나무로 엮어 만든 울타리를 말한다.

(4)목책(木柵)통나무를 땅에 박아 만든 것으로 농촌 주택에 쓰이며, 방어 시설로서 담(墻)의 가장 원초적인 형태로 쓰여졌다. 그 성격은 일반 농가의 담이라기 보다

성곽의 성격이 더욱 뚜렷한 것이다.

(5)판장(板檣)나무 기둥을 일정한 간격으로 세우고 여기에 가로로 인방(引枋)을 보낸 후 널판을 대서 만든 것이다. 이 판장은 과히 아름답지 못한 결점을 가지고 있다.

(6)돌담(石墻)

막돌 허튼층 쌓기 : 지방의 일반 농가에서 널리 이용되며 대부분의 경우 이 돌담의 상부에 초가지붕 혹은 기와 지붕을 설치하여 몸체의 지붕과 조화되도록 한다.(그림3)

다듬은돌 바른층 쌓기 : 사고석(四塊石)을 석회줄눈으로 층을 맞추어 쌓는다.

이 돌담의 상부에는 일반적으로 기와 지붕을 한다.

이는 담(墻)을 이용하는 건축이 궁궐건축, 관아건축, 상류주택 등 높은 수준의 건축이기 때문이다. (그림4)는 사고석 바른층 쌓기로 건축한 관아건축으로 석회와 흙으로 줄을

맞추어 쌓아 나갔다.

(7)토담(土檣)일반 농가에서 널리 사용되는 담(墻)으로 흙과 지푸라기, 석회들을 쌓거나 아니면 여기에 돌을 넣어 쌓기도 하며 이 담(墻)의 상부도 초가지붕 또는 기와지붕을 설치하며,

역시 몸체의 지붕과 같은 재료로 처리한다.

(그림5)는 토담으로 담의 기와 지붕이 주위의 기와 지붕과 어울린다.

(8)벽돌담( 檣)검은 벽돌로 쌓아 만든 담은 중, 상류 주택, 궁궐 등에서, 붉은 벽돌로 쌓은 담은 주로 궁궐건축에서 널리 이용되었으며, 이들은 모두 상부에 기와지붕을 얹었다.(그림6)

(9)복합형돌과 벽돌을 혼용하여 만든 담으로 대체로 아래 부분은 돌로, 윗 부분은 벽돌로 쌓으며, 상부에는 기와 지붕을 한다.(그림7)

[ 그림1 - 안성 동대총 전실 남벽 서부 ]

[ 그림2 - 생울 ]

[ 그림3 - 돌담:구례 화엄사 ]

[ 그림4 - 돌담:종묘 ]

[ 그림5 - 토담:하회 유씨종가 사당 ]

[ 그림6 - 벽돌담 ]

[ 그림7 - 벽돌담 ]

 

Ⅲ. 한국 담(墻)의 조형성  


1. 지형적 영향

우리나라 지형은 대부분 노년기 지형을 형성하고 있다. 농촌의 대부분은 뒤로는 산을 업고, 앞으로는 들을보고 있으며 들판 너머에는 다시 산들이 담(墻)을 이루고 있다.

시골 농가의 초가집 지붕의 부드러운 선은 서울의 궁궐 건축에서도, 전통 의상의 선에서도 나타나며 이것은 산과 동산의 능선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주변 환경은 우리 자신을 자연에 친숙하도록 하였으며 자연물을 이용하는데 있어능란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자연물을 인격화하여 자연과 하나되어 살아왔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배경은 우리의 조형 의식에 있어서 공간을 지각하는데 특정한 사상이나 태도를 갖게 하였다고 할 수 있다.

우리 민족의 기층적 관념 체계를 이루어온 여러 사상중에 풍수지리설은 지형, 지세, 기후,토양 등을 고려하여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형태로 만들어졌으며 그러한 경험들이

하나의 사상으로 정리된 것이다.

지형, 지세, 기후 등에 의하여 형성된 우리 전통 마을의 지형적 특징은 저산성(低山性) 중기복 산지로 어디에서나사방이 산으로 둘러쌓여 있다.

이것은 공간 지각에 있어서 하나의 경계로 작용하여 우리의 시선은 그 경계선 밖으로더 이상 진전할 수 없게 된다.

인간이 서 있는 입점에서의 최대한의 지각 공간은 평야 지역이나 해양 문화권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작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이 공간에 대하여 가질 수 있는 심리적 긴장감은 원형 공간의 규모가 클수록 커지는 것에 반하여 우리의 원형 공간은 긴장을 느끼지 않아도 좋을 만큼의 적정한 규모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지형적 영향은 우리 의식에 안정되고 조화로운 균형감을 제공해 주었다.

이것은 산과 동산으로 이어지는 공간 안에서 이웃은 한 가족으로 지내왔으며 담 안쪽의 공간은 서양의 실내공간과 같은 개념으로, 담은 실내 공간과 실외 공간을 구획짓는 벽의

역할에 가깝다.


2. 사회적 영향

한국의 전통적인 담(墻)은 그 건축주의 사회적 신분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으며, 사회적 신분에 따라 그 의장,구조가 달라진다.

즉 서민을 중심으로는 돌담이나 울과 같은 극히 자연적인 형태의 담(墻)을 구성하나, 중, 상류주택에서는 사괴석담(四槐石墻), 벽돌담, 화문담(化紋墻) 등 극히 의장적인 담(墻)을

형성한다.

또 동일한 담이라도 담장에 설치한 지붕구조에 있어 차이가 난다.

즉 초가지붕은 서민 계급에 널리 쓰이고 기와지붕은 중, 상류주택에서 사용하는 것이다.

특히 궁궐 건축의 담은 기와지붕 밑에 둥근 보를 설치함으로써 권위 의식을 나타내고 있다.

담(墻)의 높이 역시 신분 계급의 표현적 요소가 되고 있다.

민 주택에서 담(墻)은 대지 안과 대지 밖을 구분하는 단순한 경계물로서의 성격이 짙은 반면, 중, 상류주택의 담(墻)은 대지의 경계는 물론 외부에 대하여 극히 방어적 성격을 강하게

나타내고 있다.


3. 공간적 특징

3.1. 공간의 분활

우리의 주거 공간에서 행랑채의 담(墻)은 행랑 마당을 위한 것이고 사랑 마당과 안마당 사이의 담(墻)은 이 두 공간이 남녀구별에 의한 공간 분화를 이루도록 한다.

즉 대지 주위를 둘러서 담(墻)을 쌓고 일단 외부 공간과 다른 성격의 공간을 형성한 후 다시 그 속에서 공담(空墻)을 쌓아 그 두 공간을 서로 다른 성격의 공간으로 전환시킨다.

창덕궁의 연경당에서 처럼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 쌓은 공담(空墻)(그림8)은 사랑마당과 안마당이라는 두 공간을 형성지어 주며, 남성적 공간이 되고 후자는 여성적 공간이 됨으로써,

강한 공간 성격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사당(祠堂)의 담(墻)은 제사 공간과 일반 주거 공간의 구별을 이루어 주며 이 공간이 같은 주택 내에서 특히 신성한 공간임을 말해 주는 것이다.

특히 우리의 담(墻)은 크고 작은 공간으로 분화시켜, 공간마다 특유한 공간 정서를 이루게 한다.

이것은 사찰에서도 느낄 수 있는데, 일주문을 지나 대웅전 마당에 이르게 되기까지 담(墻)과 문에 의해 크고 작은 공간의 변화를 느끼게 된다.

그러나 분화된 공간과 변화하는 공간을 담(墻)은 동일한 재료의 반복과 구조를 통하여 공간들의 통일감을 가져다준다.


3.2. 공간의 침투성

담(墻)은 공간과 공간이 분할된 채 독립성을 유지시키지 않고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갖음으로 우리의 자연주의 사상에 보다 접근하고 있다.

담(墻)에 살창이나 교창을 설치하여 이 마당이 이루는 공간과 저 마당이 이루는 공간이 서로 관입되게 한다.

월성 독락당(그림9)에서 처럼 담(墻)에 살창을 뚫어서 대청에 앉아 살창으로 앞 냇물을 바라볼 수 있게 한 것은 바로 인공공간이 자연 공간에로의 침투를 의미한다.

또 안국동 윤씨가의 담(檣)에 설치된 교창은 이 마당과 저 마당을 상호 관입시키므로 하나의 유기적인 공간이 형성된다.

조선시대의 담(墻)은 적극적 공간(Positive Space)과 소극적 공간(Negative Space)의 교차 반복으로 구성되게 하며, 안채는 적극적인 공간으로서 주위에 소극적인 공간을

갖게 되나 일단 담(墻)을 둘러 쌓음으로 보다 큰 적극적인 공간이 되고 또 그 주위를 소극적 공간이 둘러 쌓게 된다.

결국 적극적인 공간과 소극적인 공간의 교차 반복은 쉽게 이루어진다

(그림10).

이와 같이 한국 전통담(檣)은 한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침투하여 그 범위를 넓혀가며 인공적인 공간에서 자연적인 공간으로 확대되어 간다.


3.3. 공간의 위계성

담(墻)은 인공적 공간인 건축 공간이 자연 공간으로 확대되게 한다. 구릉지에 건축된 담(墻)은 낮으막하고, 또 담(墻) 안의 대지가 담(墻) 밖의 대지보다 높음으로써 외부에서는

담(墻)안이 보이지 않으나 담(墻) 안에서는 쉽게 자연 공간을 감상하고 동화될 수 있게 한다.

이처럼 담에 의해 담안의 공간이 담 밖까지 연장된다.

외부 공간 마저도 내부 공간으로 끌어 들여 인간은 자연 속에 한 부분임을 드러내며, 또한 우리의 지형을 능란하게 이용한 선인들의 지혜가 용해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림11)은 낙선재 후정담으로서 멀리 있는 숲을 담장 안으로 끌어들이며 지형을 이용한 공간의 위계성을 나타낸다.

조선시대의 담(墻)은 율동적인 몸새를 하고 있다. 경사면을 따라 나란하게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단을지으며 내려와 미를 일으킨다. 이것은 담(墻)이 갖는 지루함을 깨뜨리고

우리 지형을 이해한 역동적 조형이라 할 수 있다.


3.4. 의장적 특징현존하는 담

(檣)을 살펴보면 그 의장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다.

서민의 담장에서도 기와 깨진 조각이나 여러 형상의 돌로 치장했으며 궁궐이나 상류층의 고급스럽게 쌓아 올린 것을 볼 수 있다.

우리의 담은 단순히 대지의 경계 혹은 방어를 목적으로 쌓아 올려 지지 않았으며 마당은 실내 공간과 같은 역할을 하며, 담은 벽에 해당하여 늘 바라보는 자연의 일부였기 때문에

벽에 대한 치장을 통하여 높은 우리의 조형 의식을 엿볼 수 있다.

각 담(檣)의 의장적 특징을 분류하여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1)막돌의 반복막생긴 돌 그 자체를 아무런 가공없이 쌓아 그 자체를 시각적 요소로 하여 획일적으로 반복시킨 것으로, 막돌의 크기로 변화를 주게 된다.

이때 층을 맞추어 쌓는 바른층 쌓기와 층을 맞추지 않는 허튼층 쌓기(그림3)가 있다.

(2)사고석의 반복동일 크기의 사고석을 반복시키기 때문에 그 어느 담(墻)보다 강한 통일성을 가진다. 이는 정사각형 돌들을 막힌 줄눈으로 바른층 쌓기 하는 것으로 궁궐과

중, 상류주택에서 널리 쓰였다.

때로는 토대(土臺) 부분에 사고석 대신 다듬은 돌(長臺石)을 쌓고(그림4), 그 위에 사고석을 쌓아 변화를 기도 한다.

(3)벽돌의 반복동일 크기의 벽돌을 획일적으로 쌓는 방법이다(그림6).

강한 통일성은 있으나 변화는 없다. 따라서 때로 무늬를 맞추어 벽돌을 일부 十자형으로 빼냄으로써 변화를 얻는다.

이 수법은 영롱담(玲瓏檣)이라고 불리우며 상류 주택에서 채택되고 있다.(그림12)

(4)돌과 기와편의 반복중력이 크게 작용하는 담(墻) 아래 부분에는 돌로, 윗 부분에는 흙 한 켜, 기와 한 켜를 세우거나 눕혀서 흙을 섞어 쌓는 방법으로 재질과 크기의 변화로

지방의 주택이나 사찰의 담(墻)에 많이 쓰인다.

독특한 조형성을 가진 해인사의 토석담에 사용된 기와는 깨진 것을 이용하여 이미 사용 되었던 폐품을 적절히 이용하여 아름다운 담장을 만들어낸 흥미있는 담이다.(그림13)

(5)돌과 짚의 반복지푸라기나 새끼줄을 잘라 돌과 함께 쌓는 방법이다.

크기나 재질의 변화로 흥미를 일으킨다. 지방의 주택에 많이 쓰인다.

(6)벽돌, 돌, 둥근 돌의 반복아래 부분을 사고석으로 윗부분을 벽돌로 쌓고 벽돌 중간 중간에 둥근 돌(원형으로 가공한 돌)을 끼워 놓는 방법이다.

재질의 변화와 둥근 돌의 배치가 흥미를 불러 일으키며, 보통 궁궐 건축의 담(墻)에 이 양식을 많이 이용하고 있다.

낙산사의 담은 황토와 벽돌로 켜를 이어 쌓아 올리는 사이에 둥근 돌로 일월성신(日月星辰)의미로 우주의 운행이 그 안에 있고 행복이 다가 오고 있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그림14)

(7)화초담(花草檣), 화문담(花紋檣)상류주택, 궁궐건축, 관아건축 등의 담(墻)에서는 돌, 벽돌, 기와편 등으로 쌓으면서 여러 문채를 구성 장식한다.

이런 장식적인 담(墻)을 화초담(花草檣), 화문담(花紋檣)이라 하며 이것을 통틀어 꽃담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여기서 이용되는 무늬에는 다음과 같이 여러 종류가 있다.

① 문자무늬(文字紋)

길상문자(吉祥文字)인 수복(壽福), 강령(康寧), 부귀(富貴), 다남(多男), 만수(萬壽), 쌍희(囍) 등을 벽돌로 무늬를 놓아 쌓는 것이다.

이때 무늬는 대개 벽돌로 구성하거나 때로는 석회줄눈으로 띄를 두룬 후 그 뒤에 청색이나 적색으로 칠을 하게된다.

(그림15)는 해남 대흥사의 외담으로 강가에 흔히 있는 돌을 크기에 따라 쌓아 올리고 기와로 직선의 구획을 한 뒤, 부(富)자를 새긴 길상무늬 담(檣)이다.

② 동물무늬(動物紋)

상서로운 동물로 생각하는 사슴이나 길조(吉鳥)로 생각하는 학 같은 조류들을 무늬로 하여 장식한다. (그림16)은 경복궁 자경전 동쪽 전축문의 한 부분으로 봉황새 부조 도판이다.

③ 식물문(植物紋)

국화, 매화, 난초와 같은 꽃이나 대나무, 소나무, 석류나무 등을 무늬로 삼는 경우로서 화초담(花草檣)이라 부르게 되는데 꼭 식물문 만이 아니고 동물 무늬를 섞어서 구성 하여도

화초담(花草檣)이라 부른다.

화초담에 나타나는 식물은 동물 무늬와 마찬가지로 여러가지 기원을 담고 있다.

매화는 여인의 정절에 비견 되기도 하며, 포도 무늬나,석류문은 다산(多産) 을 의미한다.

또, 바람에 날리는 대나무는 선비의 굳은 절개를 나타낸다.(그림 17)

④ 기하문(幾何紋)

기하학적 모양으로 육각형의 귀갑문(龜甲文), 완자문, 아자문(亞字文), 영롱문 등과 같은 기하학적인 문채(文彩)로 장식한다.

(그림18)은 낙선재 담(樂善齋檣)으로 완자문과 구갑문의 복합구성과 고저(高低)차에 대한 처리가 뛰어나다.

⑤ 십장생문(十長生紋)

동물과 식물 무늬를 혼합한 것으로 장생불사(長生不死)한다고 생각하는 열가지를 문채화(文彩化)한 것으로 해, 산, 물, 돌, 구름, 솔, 학, 불로초, 거북, 사슴들이 바로 십장생물

(十長生物)로 이를 담(墻)에 장식한 것이다.

이미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부분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면 십장생 무늬의 역사는 상당한 듯 하다.

[ 그림8 - 창덕궁 연경당 ]

[ 그림9 - 월성 독락당 ]

[ 그림10 - 창덕궁 연경당의 담 ]

[ 그림11 - 낙선재 후정담 ]

[ 그림12 - 영롱담 ]

[ 그림13 - 해인사 토석담 ]

[ 그림14 - 낙산사의 담 ]

[ 그림15 - 해남 대흥사 외담 ]

[ 그림16 - 봉황새 무늬 ]

[ 그림17 - 대나무 무늬 ]

[ 그림18 - 기하문 ]

 

Ⅳ. 결 론  

우리의 선조들은 자연을 중요시하여 자연과 친숙하기를 즐겼고, 자연에 동화되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다.

그러한 생각은 담의 축조에 있어서도 지형에 순응하며 축조 되었으며 시각적으로나 기능적으로 큰 비중을 차지해 왔다.

우리의 전통 담은 주 건축물의 몸체와 같은 계통의 재료로 통일감을 갖고 있으며, 외부 환경의 여러 구성 요소를 둘러 쌓음으로써 하나의 통일된 공간 속에 융합시켜 준다.

이러한 조선시대 담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한국 전통 담의 조형적 특징을 규정 지을 수 있다.

첫째, 한국 전통 담은 지형적인 영향을 깊이 받고 그러한 환경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이용하였으며, 신의 섭리에 대처하고 순응하는 사상이나 태도를 갖게 하였다.

이것은 조형적으로 주변의 지형적 환경에 동일한 실루엣을 갖는다.

둘째, 담은 그 시대의 신분 계급을 담의 높이 또 그 의장적 특징을 통하여 강하게 나타내고 있다.

일반 서민의 담이 대지의 경계를 구획하는 시설물이라면 상류 주택이나 궁궐에서는 방어적 성격이 두드러진다.

셋째, 담은 공간을 분할하고 분할된 공간은 담에 설치된 교창이나 살창 등을 통하여 관입된다.

담 안쪽의 공간은 담을 통하여 자연과 유기적인 관계를 지니며 인공 공간을 자연 공간으로 확대시킨다.

넷째, 담은 선조들의 지혜와 경험을 바탕으로 그들의 기원을 담아 형이상학적 조형을 담장에 표출하였다.

문자를 통하여 만수무강을 기원하였으며 삼라만상을 담장에 새겨넣고, 절개와 다산을 기원하는 무늬를 새겨 넣었는데, 이것은 담장에 아름다운 의장으로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우리는 높은 조형미를 갖고 있는 독특하고 아름다운 전통 담장을 가지고 있다.

전통이란 민족생활 양식이 역사적 발전 과정을 거쳐 형성된 정신을 통하여 형식의 표현, 조형성 및 기법토대로 계승 발전되어 온 것이라 할 수 있다.

끊임없는 외세의 침략으로 시련을 겪는 역사 속에서도 주변 국가의 영향을 받지 않고 독특한 조형성을 오늘날까지 이어온 우리의 전통 담을 오늘날 서구화된 생활 양식과

조화되는 독창적방법으로 계승 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한옥의 철재

 

우리의 전통창호철물은 문짝을 조립하는데 쓰이는 철물들을 포함한다. 이러한 철물들이 외부에 노출되는 경우에는 장식이 가미되어 장식적 요소로 보이기도 한다.

가벼운 문짝용
돌쩌귀, 삼배목, 들쇠, 달쇠, 원산

무거운 문짝용
대접쇠, 확쇠, 신쇠, 장부쇠, 찰쇠, 감잡이쇠, 원산석

광두정, 방환
대문의 판재를 고정하디 위해 박는 장식적인 못으로 못머리가 방형이다.

조족정구, 띠쇠
문의 울거미의 변형을 막기 위해 가로재와 세로재가 만나는 부분에 보강하는 철물로 T자형이나 ㄱ자형이다. 띠쇠는 길이에 비해 폭이 넓은 얇은 철판이고, 조족정구는 띠쇠보다 폭이 좁고 장식적이다.

돌쩌귀
요즘의 정첩. 문설주에는 구멍이 있는 암컷을 박고, 문짝에는 뾰족한 돌출부가 있는 수컷을 박는다. 문짝을 들어다 암컷의 구멍에 수컷의 촉을 끼우면 문을 여닫을 수 있게 된다. 암컷을 암돌쩌귀, 수컷을 숫돌쩌귀라고도 하며 촉이 독립적으로 분리된 것을 심대라고 한다.

문고리, 배목, 비녀장
문을 열고 닫을 때 잡아당기거나 문을 잠그기 위한 원형띠의 철물이 문고리이고 문고리를 고정하는 철물이 배목이다. 문고리를 잠그기 위해서는 비녀처럼 생긴 철물을 배목에 꽂는데 이를 비녀장이라 한다.

들쇠, 달쇠, 걸쇠
분합문은 위로 들어 걸 수 있는 문에 사용된다. 걸쇠는 서까래에 매달려 있는데, 걸쇠끝부분에 90도로 꺽인 철물에 문짝을 직접 얹는 방식과 끝부분에 고리가 있는 두 걸쇠를 매달고 그사이에 끼워진 각목위에 문짝을 얹는 방식이 있다.

원산(遠山), 원산석
요즘의 도어스톱개념. 두짝 문짝인 경우 문짝이 더 이상 밀려들어가지 않도록 문지방 가운데에 반원형의 작은 철물을 박아주는데 이를 원산이라고 한다. 대문과 같이 큰문에는 철물대신 돌을 박아주는데 이를 원산석이라 한다.

국화정
문짝에 문고리나 못을 박을 때는 못대가리 주변을 국화꽃처럼 생긴 얇은 장식철판으로 장식하는데 이를 국화정 또는 국화쇠라 한다. 줄여서 괏쇠라고 하며 창호외에도 널리 사용되었다. 국화정은 못구멍이 있어 못과 같이 쓰였지만 광두정은 못머리 자체에 장식을 한 것이다.

오족철, 새발장식
연귀맞춤 등 맞춤으로 연결시킨 문짝의 선대와 막이 등이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 사용된 철물

삼배목
돌쩌귀의 일종으로 들어열개 창호에 다는 철물이다.

 

 


문의 초석을 새로 만들 때에 큼직한 돌을 구하여 네모기둥을 세울 홈을 파고, 문설주를 세울 홈도 파고 확쇠를 박을 홈을 만들다가 실패하였다.

다듬기도 어려운 돌을 사용한 외에 돌에 결이 생겨서 무거운 무게를 견딜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을 것이다.

문 초석을 만들다 그만둔 것이 서문 밖의 민가 자리에 남아 있는 이유가 그렇다. 문의 초석은 성밖의 어딘가에서 결이 없는 화강암을 구하여 만들고 운반한 것이다.

 

 

 

 

 

국화정의 신구

국화정

 

국화정과 띠쇠

국화정과 띠쇠 - 띠쇠는 주로 판문에 철판으로 보강하는 장식

 

띠 쇠

띠쇠

 

돌쩌귀

돌쩌귀

 

국화정

문짝에 문고리나 못을 박을때 주변에 얇은 장식철판으로 장식하는 것을 국화정이라 함

 

돌쩌귀

돌쩌귀는 현대건축의 정첩과 같다.

 

문장식

문장식

 

문장식

국화정과 문고리

 

걸 쇠

분합문을 걸기 위한 것이며 걸쇠 또는 들쇠라고 한다.

 

들장지를 걸어두는 장치로 이것의 이름이 달쇠이다.
전통한옥에 많이 사용되는 것으로 여름을 시원하게 보내기위한 것이다.

 

 들쇠와 분합문  

 

 


분합문(들어열개문)을 천장에 매달때 사용되는 도구

 

 

대접쇠 -문장부가 들어가는 문둔테 구멍의 가장자리에 대는, 말굽 모양의 쇠. ≒마제철(馬蹄鐵)·첩금철.

 



삼년산성 남문지 출토 확쇠 암수 모습

확쇠 - 문지도리의 장부가 들어가는 데에 끼는, 확처럼 생긴 쇠.

 

 

문경 고모산성 출토 유물

  서문 터 바닥에서는 성문 기둥을 고정시키기 위한 확쇠 2점이 출토되었다. 확쇠는 아래확쇠와 윗확쇠가 결합된 채 출토됐으며 주변으로 원형 철제판이 돌아가고 있다.

 

감잡이쇠,띠쉬,안장쇠,꺽쇠,듀벨

 
계자각은 하엽 밑에서 장부맞춤하고, 두겁대는 하엽 위에 물리고 감잡이쇠를 감거나

    못으로 고정한다.

 

 
 

 

문살의 철물

 

잠금장치에도 화려한 멋이 풍긴다 - 자물쇠

지금 당신의 주머니에 몇 개의 열쇠가 있는가? 열쇠가 많으면 많을수록 당신은 타인으로 부터 보호되어야 할 소유물이 많다는 이야기가 된다. 왜냐하면 열쇠를 채워놓은 것은 나름대로 소중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살고있는 집은 물론 사무실, 자동차, 금고, 캣비넷 등으로 부터 작게는 개인용 컴퓨터와 보석함, 그리고 일기장에 이르기까지 주변은 온통 자물쇠로 채워져 있어 열쇠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정도이다. 더욱이 최근에는 디지털이 생활에 적용되면서 카드열쇠, 홍채, 지문으로 다양한 열쇠의 사회가 되었다.


우리 선조들은 어떠 하였을까?

물론 일반서민들에게 열쇠는 필요없는 물건이었다. 먹고 살기도 힘든 마당에 열쇠를 채워 놓을 물건이 있을리 만무하기 때문에 열쇠를 말하는 것은 대개 있는 집의 얘기가 된다.
있는 집의 열쇠는 일반적으로 집 밖의 열쇠는 남편이 관리하였지만, 집안의 모든 열쇠는 부인이 관리하였다. 그래서 시집 온 며느리에게 열쇠꾸러미를 넘겨주는 것은 집안의 모든 살림을 넘겨주는 것과 같은 상징성이 있었다.
가장 소중한 것을 보호하여 주는 자물쇠이기에 그 모양새도 그냥 대충 만듬이란 없다. 보호개념이 강하여 신성한 문양으로 만든 주술적 자물쇠가 있는가 하면, 집안에 놓고 항시 보아야 될 것이기에 장식성을 가미하여 화려하게 만들기도 하였다.

또한 이 자물쇠를 여는 열쇠는 어차피 기능성이 앞에 있기에 열쇠에 보다는 열쇠를 매다는 고리, 즉 꾸러미에 더 신경을 썼다. 대개는 커다란 철사에 주렁주렁 매다는 것이 보편적이었지만, 동전모양의 커다란 원판에 매달기도 하였는데 그 원판에는 글씨나 동물문양을 새겨넣기도 하였고 때로는 아예 동전처럼 만들어 사용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자물쇠와 열쇠는 동양에서는 독립된 개체로 매달아 사용하면서 여러 가지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데 서양에서는 동양과는 조금 달리 발전하였다. 동양에서는 문짝(門扉)에 고리를 매달아 이 고리를 서로 연결하는 방편으로 자물쇠를 사용하였는데, 서양에서는 자물쇠를 아예 문에 장착하여 놓는 방식을 사용하였다. 그래서 문에 열쇠구멍이 있어 바로 열게 되었고, 이러한 것은 커다란 성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성을 정복한 자는 정복당한 이에게 항복의 표시로 성의 열쇠를 건네 받는 의식이 생겨났다.
이런 의식에서 ‘행운의 열쇠’가 탄생하였으니 서양에서는 자물쇠의 의미보다는 열쇠의 의미가 더욱 컸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열쇠가 들어가는 열쇠구멍도 많은 의미가 부여되는데, 이 구멍을 통해서 집안으로 마귀가 들어 온다고 믿었기 때문에 아이의 탄생이나 아주 중요한 회의를 하는 날에는 열쇠구멍을 막아 신성함을 유지하였다.

그러면 우리선조들은 언제부터 자물쇠를 사용하였을까?

문헌에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지만, 아마도 인간의 소유물이 생겨나기 시작한 청동기시대부터 어떠한 형태로든지 사용하였으리라 짐작된다. 발견된 유물로 본다면 안압지에서 발굴된 철제자물쇠와 호암미술관에 소장된 빗장유물이 통일신라것으로 보이기에 그때부터 일반화가 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지만 워낙 부식이 심하여 형태를 볼 수 가 없다.
현존하는 전통 자물쇠는 대개 조선시대 후기의 것들인데, 그 모양이나 용도가 참으로 다양함을 알 수 있다. 단순한 사각모양으로부터 사작하여 물고기모양에 이르기까지 모양도 다양할 뿐 아니라 그 몸통에 새겨진 문양도 복을 불러오는 글씨부터 십장생의 동물문양까지 다양하다.
이러한 형태는 모두 조선후기의 것들로 유교가 뿌리를 내리면서 영향을 받은것 들인데 그 이전 즉 불교국가로 볼 수 있는 신라나 고려시대의 것들은 남아 있는 것들이 없다. 이렇게 조선 이전의 것들이 남아 있지 않는 이유는 자물쇠가 채워진 물건, 즉 뒤주나 보석함과 같이 나무로 만들어진 물건들이 용도폐기되면 금속으로 만들어진 자물쇠도 같이 폐기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선조들은 자물쇠를 가구의 일부로 본것이라 고려시대나 삼국시대의 자물쇠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것이다.

다만 옛 석조물에서 그 형태를 찾아 볼 수있는데, 석탑이나 옛 고승들의 사리를 보관하고 있는 부도에서 그 원형을 찾아 볼 수 있다. 석탑의 경우 대개는 사각의 형태인데, 몸통 1단 정면에 전통적인 여닫이 문의 모양이 새겨져 있고, 그 가운데는 영락없이 열쇠가 채워져 있는 모습이 있기 때문이다.

원래 석탑은 불교에서 가장 신성하게 여기는 석가모니의 사리가 모셔져 있는 곳이므로 가장 소중하게 여겨야 할 공간이기에 이를 보호하는 경호원격인 신장을 새겨놓음은 물론이고, 출입문에는 단단하게 자물쇠로 채워놓은 것이다.
이러한 형태는 통일신라 후기부터 고려초기에 생겨나는 부도에서도 나타나는데, 부도 자체가 화려하기에 여기에 표현되는 열쇠 또한 가장 화려하게 장식되어 나타난다. 시대적인 양식에 따라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보통의 사각형의 자물쇠에 장식성이 가미되어 양쪽 끝에 불길모양의 화염문이나 구름문양의 운문이 조각되어 잠금에 대한 신성성을 강조하였다.

1989년 경북 예천의 작은 절인 한천사(寒天寺)에서는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던 사찰을 새롭게 바꾸는 조경공사가 한창이었다.
물길에 쓸려내려간 마당을 복구하고 나무를 심는 와중에 무엇인가 흙더미에서 쓸려 나온 덩어리가 있었다. 너무나 오랫동안 땅속에서 묻혀 있어 형태는 알 수 없지만 청동으로된 조각이었다. 더 깊게 발굴하여 본 결과 쇠북의 일종인 청동반자와 종의 상부에 놓이는 청동용뉴, 그리고 금동자물쇠가 세 개나 출토 된 것이다.
그 중 금동자물쇠의 모양은 통일신라와 고려초기에 조성된 탑과 부도의 자물쇠와 모양이 똑같아 문양으로만 보아온 실물을 볼수있게 되었다.
이 자물쇠를 보존처리하여 본 결과 자물쇠 몸통에는 뽀족한 송곳을 작은 망치로 두들겨 문양을 새기는 은입사법으로 화려하게 장식 되어 있었다. 그 문양은 당초문양, 모란당초문양, 고사리문양, 물고기알문양이 가득 새겨져 있고, 윗부분의 걸림쇠끝에는 연꽃이 피어나듯 꽃봉우리를 장식하였다.
또한 발견된 가장 큰 자물쇠는 한쪽끝이 빠지면서 두개로 분리 되는데, 다른 작은 것들도 형태는 같지만 부식으로 분리는 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로서 석조물에 새겨진 자물쇠의 문양이 단순한 조형적 문양이 아니라 실물을 그대로 조각하였다는 것이 밝혀짐과 동시에 어떤 형태로 자물쇠를 상용하였는지도 알 수 있게 되었다.
지금 이 자물쇠 세점은 김천 직지사성보박물관에 보존처리되어 일반에게 전시되고 있어, 가장 화려한 시절에 가장 화려한 문양의 자물쇠를 직접 볼 수 있게 되었다.


 

                            

 

전통건축에 있어서의 목공사용 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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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문화재수리표준시방서에서 발췌

 

 

 

 

 

주춧돌

 

 한국과 중국의 초석

 

초석은 상부의 하중을 지면에 전달해주는 완충부재인 동시에 때로 건물의 연대를 판정해주는 좋은 자료

가 된다.

초석은 다듬은 정도에 따라 가공초석과 자연초석으로 분류해 볼 수 있다.

가공초석은 그 모양에 따라 원형초석, 방형초석, 팔각초석으로 나누어지고 그 높낮이에 따라 평초석과

장초석으로 나누어 진다.

지금까지 밝혀진 유적에서 방형초석과 장초석은 옛 백제지역인 부여와 공주, 익산지방에 많이 볼 수 있

고, 원형초석은 경주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보인다.

중국은 송(宋)대에 이미 목조건축의 설계 및 시공의 표준이 되는 '영조법식(營造法式)'이 발간되었는데

이들 초석에는 연화문(蓮花紋)과 인동당초문(忍冬唐草紋) 등이 화려하게 새겨지고 있다.

 

1 한국의 초석

 

 

 

 

                                                                                                                    장경판전 주초

 

                                                                                                                      희방사  우주

          

                                                                                                           영은문 주초

 

2 중국의 초석

 

 

 

 

 

초석(礎石)

 

초석(礎石)은 주초(柱礎) 혹은 주초석(柱礎石)이라고도 불리는데, 기둥을 통해 전달된 상부의 하중을 기초를 거쳐 지반으로 전달해 주며 지면의 습기로부터 기둥뿌리를 보호해 주는 부재이다.

   원시시대의 수혈주거에서는 기둥하부를 땅 속에 묻어 세우고 이렇게 세워진 기둥들의 상부를 묶어 원추형의 구조물을 만드고 지붕을 덮었으므로 주초가 사용되지 않았다. 이들 기둥의 땅 속 하부에 어느때인가 부터 납작한 돌을 받치고 그 위에 기둥을 세우기 시작하였으며, 이후 도구의 발달과 함께 점차 가구법이 발달하면서 기둥뿌리를 지상으로 노출시키게 되었고 이로써 주초라는 부재가 설치되고 그 역할을 하게 된것이다.

   주초는 드물게 나무로 된 것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통상 석재를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며 이로써 초석 혹은 주초석이라 불리는 것이다. 초석은 재료의 특성상 목조로 된 가구부가 소멸된 이후에도 남아 있는 경우가 많아 당시의 건물평면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자연석 초석 (덤벙주초)

초석상면을 가공하지 않고 울퉁불퉁한 자연석을 그대로 초석으로 사용한 것을 말하며, 초석상면이 고르지 않아 초석간의 수평이 맞지 않게 놓여져 덤벙주초라고도 한다.
   이와 같은 덤벙주초에다 기둥을 세울 때에는 기둥뿌리부분을 초석상면의 형태와 같이 다듬어 세우게 되는데 이를
그랭이질이라 한다.
   덤벙주초는 주로 백성들의 살림집에서 사용하지만 사찰의 대웅전과 같은 큰 정전건물에서도 사용한 예를 흔하게 볼 수 있다.
   덤벙주초는 때에 따라서 기둥이 놓이는 주좌면만을 살짝 가공하기도 한다.

                      

                              덤벙주초

 

가공석 초석 (정평주초)

다듬은 돌을 사용한 초석은 상면의 수평을 맞추어서 놓게 되는데 이는 정평주초라고 한다.
   다듬은 돌초석의경우에도 그랭이질을 하여 기둥을 세우게 된다. 이들 다듬은 돌초석은 상면에 기둥을 앉힐 자리에 따로이 다듬어 돋게 만드는 경우가 많은데 이를
주좌(柱座)라고 한다. 주좌는 원형 혹은 방형으로 된 것이 일반적이지만 드물게 팔각형으로 된 것도 있다. 이들 주좌의 형태는 그 위에 놓이는 기둥이 두리기둥, 네모기둥, 팔각기둥이었음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그리고 주좌의 단 수도 1단으로 된 거쇼과 2단으로 된 것이 있으며 드물게는 3단으로 된 것도 있다. 주좌의 단면형태는 4분원과 직각형태가 일반적인데 이렇게 주좌를 가공한 것을
쇠시리라고 한다. 외진주나 우주에 사용된 초석 중에서는 하인방을 받도록 고막이를 돋운 것들도 볼 수 있어 주좌의 평면형태는 초석의 사용위치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초석의 형태별 분류는 주좌의 형태에 따라 분류한다. 즉 주좌의 형태에 따라
원형초석, 방형초석, 육각초석, 팔각초석, 모죽인방형초석, 특수형초석 등으로 분류한다. 조선시대 초석에는 주좌와 초반 사이에 운두(雲頭)를 둔 것이 많다. 운두는 주좌를 받치고 있는 것으로 초석 입면의 높이를 높일 뿐만 아니라 장식의 역할을 한다. 대부분 삼국시대의 초석들은 운두가 없고 주좌의 높이가 낮으며 초반의 폭이 넓은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고려시대는 다른 석조유적이 모두 화려해지고 장식적ㅇ로 바뀌는 것처럼 초석도 장식화 되었다. 그러한 실례로 법천사지 부도전에 있는 초석을 들 수 있는데 주좌 밑에 낮은 연꽃장식의 운두를 둔 화려한 초석이다.
   초석은 주좌가 원형인 원형초석이 가장 많이 사용되었는데 삼국시대에는 방형의 주좌를 갖는 방형초석도 많이 쓰였다. 다각형의 초석은 대부분 정자건물등의 특수 건물에 사용되었는데 좀더 특수한 형태로는
칠각초석 및 도피안사에서 발굴된 배부른 장방형 초석이 있다.

                 

                                  정평주초

 



           

                                    원형초석



           

                                  방형초석



                         

                             

 

                                  팔각초석

 

사다리형초석은 18세기 이후 살림집에 많이 사용했다. 주좌없이 초반의 형태가 위쪽은 약간 좁고 밑동은 약간 넓은 형태의 사다리꼴 초석으로 평면은 원형과 방형이 있다. 이 중에서 방형이 많이 쓰였으며 보통 초석의 높이는 1자 정도이다. 일반적으로 살림집에서는 가공한 초석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였는데 조선후기 양반가에서 이러한 초석이 쓰이기 시작했다.

                                           
                                  사다리형 초석

 

특수한형태로는 칠각초석 및 도피안사에서 발굴된 배부른 장방형 초석이 있다.
   칠각초석은 고주몽의 설화에 나오는데 고주몽이 북부여를 탈출하면서 유화부인에게 자식을 의탁하고 신표를 숨겨두었다. 찾아보니 주춧돌과 기둥사이에 신표가 있었는데 그 초석이 일곱모였다고 한다. 고주몽 설화는 기원전 37년의 일이므로 이미 기원전에 칠각초석을 사용할 정도로 당시의 기하학적 식견이 대단하였으며, 건축기술의 수준 또한 높았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고복형

 

장주초석은 일반초석에 비해 월등히 키가 큰 초석을 말한다. 물론 장주초석도 단면형태로 분류하면 원형, 방형, 다각형 등으로 다양하다.
   장주초석은 주로 중층의 누각건물에서 많이 사용된다. 누각 건물은 처마를 아무리 만이 매더라도 건물자체가 높기 때문에 1층기둥이 많이 썩기 때문에 장주초석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조선시대 살림집의 사랑채 누마루 초석을 장주초석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경복궁 경회루와 같이 습기가 많은 곳에서는 아예 돌기둥으로 하는 경우도 있다. 높이가 비슷해 돌기둥과 장주초석의 구분이 잘 안되는 경우가 있는데 조금이라도 목조기둥이 있으면 장주초석으로 보야아 한다.

 

고맥이초석은 하방 밑에 생기는 화방벽과 만나는 초석 측면의 마감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 만들어지는 특수한 초석이다.
   즉 기둥 밑을 가로로 연결하는 인방재를
하방이라고 한다. 하방은 보통 초석 위에서 연결되기 때문에 하방 밑으로 기단면과의 사이에 초석 높이 만큼의 공간이 생긴다. 이 부분을 막는 벽을 화방벽이라고 하는데, 이 화방벽을 막을 때 고맥이 초석이 아니라면 초석의 주좌와 운두의 불규칙한 선을 따라 화방벽이 만나기 때문에 마감이 깨끗하지 못하다. 그래서 초석에 아예 살을 덧붙여 놓으면 마감면이 깨끗해진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고맥이 초석이다.

                                

                               고맥이초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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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에 따른 분류는 건축구조상의 평면형태와 용도상의 건축목적에 의해 결정되는 기둥의 배치에 관련된다.
   위치에 따른 분류는 크게 세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건물 외곽을 둘러 싸고 있는
외진주 초석과 건물 내부의 내진주 초석 및 이에 속하지 않는 기타 초석으로 분류된다.

                 

                            내외진 초석 설명도

 

외진주초석은 다시 평주초석우주초석, 퇴주초석으로 세분되고 평주초석은 건물의 정면과 측면, 배면의 초석으로 나눌 수 있다.

 우주초석도 정면의 우주초석배면의 우주초석으로 나뉜다.

 퇴주초석은 퇴칸이 달린 건물에서만 볼 수 있는 초석으로 청판이 깔릴 때와 그렇지 않을때에 따라 다르다. 퇴주초석 역시 퇴평주초석퇴우주초석으로 분류된다. 외진주초석은 이와 같이 일곱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내진주초석은 소규모 건물에는 보이지 않으며 건물 평면이 넓고 건물 운두가 높을 경우에 있기 마련이다.
   이 내진주초석에는 고주(高柱)초석단주(短柱)초석이 있고 목조탑에서는 심주(心柱)초석이 건물 중앙에 설치된다. 내진주초석은 이상의 세 종류로 구분된다.

 

외진주초석류와 내진주초석류 외에 건축물에 부설된 초석들은 기타 초석류로 분류할 수 있다.
   내.외진주초석들을 연결시키는 연속초석, 즉
지대석은 기둥초석과 같이 상부의 하중을 직접 받지는 않으나 기둥초석의 수평이동을 방지하고 주벽선의 하중과, 기둥과 기둥 사이를 연결시키고 있는 하방(下枋)을 보강한다. 신방석(信枋石)도 지대석과 마찬가지의 역할을 하는데 문선주와 일각문 등의 기둥 하단을 받치고 있는 기초석이다.
   
동자석(童子石)은 건물 내부에 청판을 깔 경우 사용되는 동바리나 동귀틀, 장귀틀 멍에 등을 받치는 초석으로 마루바닥의 하중을 받는 석재이다. 일반적으로 호박돌이라고 부르는 자연석을 사용한다. 건물 외부에 난간을 부설할 때에도 난간 동자주 밑둥을 받치는 데에 이용되는데 청판 밑을 고일 때와 같이 자연석을 사용하지 않고 가공하여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활주(活柱)초석은 지붕의 추녀 부분 하중을 받고 있는 활주를 받치는 초석으로 기단부에 설치하는 석재이다. 가공하여 사용하는 경우가 많고 규모가 큰 건물에서 볼 수 있다.
   또한 수중에 초석을 설치하는 때가 있다. 누각이나 정자 건물에서 볼 수 있는 초석인데 이 초석을
수중초석이라 말할 수 있다. 창덕궁 후원의 부용정, 관람정, 존덕정, 애련정 등에서 그 예를 찾을 수 있다.

                                  

                                      활주초석

                        

                                    심주초석


 

  

초석(礎石)의 종류

 

 

 

 

건축물을 구축하기 위해 지하와 지상을 연결시켜주는 매개부재

심초석(특수초석) : 황륭사9층목탑, 사리봉안을 위한 특수초석....

기둥에 따른  초석의 크기 공부? (영조법식)

외진주 초석 -우주초석, 평주초석, 퇴주초석, 귀기둥초석 /목조탑-심주(찰주)초석

내진주 초석 -고주초석, 단주초석

신방석 - 일각문등의 기둥을 받는초석

동자석 - 동귀틀,장귀틀,멍에 밑에...

활주초석 -추녀를  받는 기둥으로서 기단부에 설치..

수중초석 - 누각이나. 정자건물  예) 창덕궁 후원의 부용정,애련정 *초각부(밑). 초두부(상부)주좌 - 볼록주좌 - 1단, 2단  예)방형1단주좌, 원형2단주좌.

*쇠시리 - 기둥주좌면 주변의 볼록형태

 

*활주초석이 높아진초석 : 기둥부재보다작고...

                                      지붕낙수로 인한 습기의 피해로 인해서. 

*주좌:마치 사다리꼴-시각적 불안정을해소위해

 

 

 

 

 

출처 : 요아킴
글쓴이 : 김일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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